토론:이국주 선생 묘
2020 국문
초고
조선 전기의 문신 이국주(李國柱, 1487~1556)와 부인을 합장한 묘.
본관은 연안(延安)으로 홍문관수찬을 지낸 이세범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1525년(중종20) 사마시에 합격한 뒤, 의장고낭청과 제용감주부가 되었다. 이때 부인 여주 민씨의 상을 당해 독신으로 지내던 중 51세 때 아들 우민의 주선으로 비안 박씨 문중의 17세 낭자와 재혼했다. 67세 때 선조대 좌찬성을 지낸 오봉 이호민을 낳았고, 70세에 이천현감으로 재직 중에 별세하였다. 늦게 낳은 아들이 현달하여 연선부원군에 증직되었다.
묘역은 2단으로 조성되어 있다. 상단에는 호석을 두른 원형봉분과 묘갈이 있다. 묘갈문은 이경의가 지은 것으로 음각되어 있다. 하단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그 좌우에는 동자석이 배치되어 있다. 조금 떨어진 좌측에는 원 묘비가 있고, 맨 아래 좌우측에 망주석이 세워져 있다.
원 묘비에는 구름 문양을 정교하게 조각해 놓았다. 앞면에는 구름 속에서 비치는 해 위에 삼족오를, 뒷면에는 구름 속에 가려진 반달을 각각 새겨 놓았다. 비문은 정사룡이 지었고, 글씨는 송인이 해서체로 썼다. 경기도 양주 천마산 언덕에 부인과 따로 안장하였던 것을 지금의 장소로 이장하면서 여주 민씨와 비안 박씨 두 부인을 합장하여 조성한 것이다.
수정
조선 전기의 문신 이국주(李國柱, 1487~1556)와 부인 여주민씨·비안박씨의 합장묘다.
이국주는 중종 20년(1525)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어서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여러 번 문과 시험에 실패하였으나 성품이 효성스럽고 의로웠다. 당시 권력자가 이러한 그를 높이 평가하여 의장고 낭청에 천거하였으며 이 자리에서 오랫동안 재직하였다. 70세에 이천현감으로 재직 중 별세하였다. 늦게 낳은 아들 이호민(李好閔, 1553~1634)이 현달하여 선조(1567~1608 재위) 때 공신에 봉해졌다.
묘역에는 호석을 두른 원형 봉분과 묘갈·상석·향로석·동자석·망주석이 있다. 묘갈은 후대에 세운 것으로, 이경의(李景義, 1590~1640)가 글을 지었다. 조금 떨어진 좌측에는 선조 즉위년(1567)에 세워진 원래의 묘비가 있다. 머릿돌 앞면에 구름 속의 태양과 발이 셋인 까마귀 삼족오를 조각하고, 뒷면에 구름 속의 달을 표현하였다. 비문은 정사룡(鄭士龍, 1494~1573)이 짓고, 송인(宋寅, 1517~1584)이 해서체로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