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이경여 선생 묘 및 신도비
2020 국문
초고
조선 중기 문신 이경여(李경여 1588~1657)의 묘와 신도비이다.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무덤가에 세워두는 비이다. 세종의 7대손으로 아버지는 이수록이다. 1601년(선조 34) 사마시,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 을과로 급제한 후 검열이 되었고 인조반정 이후 부교리를 거쳐, 청주목사, 좌승지, 전라도 관찰사가 됐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으로 왕을 호종했다.
1642년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는 문제로 심양에 억류되었다가 이듬해 돌아왔고, 1644년 사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다시 억류되기도 했다. 귀국 후 소현세자빈 사사를 반대하다가 유배되었다. 1650년 효종 즉위 후 풀려 나와 영의정이 되었으나 다시 사은사로 청에 다녀온 후에 청의 압력으로 영중추부사로 옮겨졌다. 시문에 능하고 글씨가 뛰어났으며 저서로 「백강집」 (白江集)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신도비는 1669년(현종 10)에 건립되었는데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심익현이 썼으며 김만중이 전(篆)을 했다.
수정
조선 중기 문신 이경여(李敬輿, 1588~1657)의 묘소와 신도비이다. 신도비란 죽은 사람의 평생 행적을 기록하여 무덤가에 세워두는 비이다.
이경여는 세종(1418~1450 재위)의 7대손이다. 과거급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했으며, 병자호란 때는 왕을 따라 남한산성으로 피란했다. 명나라를 높이고 청나라를 배척하는 입장을 고수한 그는 인조 20년(1642)과 22년(1644)에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명나라와 친하다는 이유로 청나라로 잡혀가 억류되기도 했다. 귀국 후에는 소현세자빈 강씨의 사사를 반대하다가 유배되었다. 효종 즉위 후 풀려나 영의정이 되었으나 청의 압력으로 곧 물러났다. 시문에 능하고 글씨가 뛰어났으며 저서로 『백강집(白江集)』이 있다.
신도비는 건립 연대가 확실하지 않지만 1678년 이후로 보인다. 비문은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짓고, 글씨는 심익현(沈益顯, 1641~1683)이 썼으며,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이 전서체로 제액(題額)*을 썼다.
- 제액(題額): 비석의 상단부에 새긴 비의 명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