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유경선 선생 묘
2020 국문
초고
유경선(柳敬先, 1519~1553) 선생과 부인의 합장묘이다. 가산면 방축리에서 출생했으며, 1553년(명종 8) 관무재 별시에 병과로 합격한 뒤, 낭장과 도총부도사를 거쳐 양산군수·한성부서윤·경원부사·충청수사·함경북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흔히 병사공(兵使公) 묘(墓)라 불리며, 금현4리 듬뱅이 야산에 위치해 있다. 부인은 정부인 전주이씨이다. 봉분과 묘비·상석·향로석, 그리고 좌우에는 동자석·망주석 등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 장명등은 1981년 도난당해 현재는 없다. 묘비는 새로 세운 것으로서 팔작지붕형의 옥개와 장방형의 비좌를 갖추었으며, 비신의 재료는 대리석이다. 본래의 묘비는 1573년(선조 9) 2월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유전이 짓고 신준이 글씨를 썼다. 풍우로 인해 각자가 마멸된 상태였으므로 1983년 종중에서 새로 건립하였다.
수정
조선 중기의 무신 유경선(柳敬先, 1519~1575)과 부인 전주이씨의 합장묘이다.
가산면 방축리에서 출생한 유경선은 명종 8년(1553) 관무재 별시에 합격한 뒤, 양산군수·한성부서윤·경원부사·충청수사·함경북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병마절도사를 지냈기 때문에 병사공(兵使公) 묘라고도 불린다. 봉분과 묘비·상석·향로석이 있고, 봉분 좌우에 동자석·망주석 등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 묘비는 원래 선조 9년(1573) 2월에 문신 유전(柳㙉, 1531~1589)이 비문을 짓고 신준(申晙)이 글씨를 썼다. 이후 비바람으로 글자가 닳고 없어져 1983년 종중에서 새로 건립하였다. 장명등은 1981년 도난당해 새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