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월성박씨 종중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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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월성박씨(月城朴氏)는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제8왕자인 월성대군(月城大君)의 자손으로 고려 후기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조선 전기와 중기에 크게 융성하였다. 중시조인 박구(朴龜, 1337∼1404)는 고려 중군사정부령(中軍司正副令)을 역임하였는데, 고려가 망하자 이곳에 칩거하면서 자신을 감춘다하여 호를 ‘장아(藏我)’라 하고 뒷산을 장아산이라 하였다.
장아산(해발 73.6m) 서쪽 구릉에 위치한 월성박씨 종중 묘역에는 현재 박구와 그의 후손인 박간(朴幹), 박휘(朴徽), 박신겸(朴信謙), 박호겸(朴好謙), 박홍중(朴弘中) 등 11기의 묘가 남아 있다. 그 중 통훈대부 추산(秋山) 박홍중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문장과 서예에 능하였고 관직을 물러난 후 장아산에서 후학을 지도하였다. 이 묘역에 있는 봉분과 묘표, 문인석, 망주석, 등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유교적인 묘제로서 특히 박휘와 박신겸, 박호겸의 묘표는 제작연대가 분명하여 조선 중기의 묘제와 조각사 연구에 중요한 금석문 자료이다.
수정 국문
초고
월성박씨의 중시조 박귀(朴龜)와 그 후손 10명의 묘(墓)가 모여 있는 묘역이다. 박귀는 고려 중군부령(中車副令)으로서 고려가 망하자 인천(仁川) 조동(鳥洞)으로 은거해 그곳을 ‘자신을 감춘다.’는 뜻의 장아산(藏我山)이라 이름 짓고 ‘장아’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
장아산 서쪽 구릉에 자리 잡은 월성박씨 종중묘역에는 박귀를 비롯해 그의 아들 박간(朴幹), 손자 박휘(朴徽), 증손자 박신겸(朴信謙)·박호겸(朴好謙)과 6대손 박홍중(朴弘中, 1582~1646) 등 월성박씨 인물 11기의 묘가 있다.
박간과 박호겸은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 관직을 두루 역임했고, 박신겸과 박홍중은 각각 생원시와 진사시에 급제했다. 박홍중은 우계 성혼(牛溪 成渾, 1535~1598)의 문인으로 광해군 때 폐모론을 주장했던 이이첨(李爾瞻, 1560~1623), 이위경(李偉卿, 1586~1623) 등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서궁(西宮, 지금의 덕수궁)에 양식을 제공하려다 일이 드러나 해남의 섬으로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풀려나 관직에 나갔다.
1차 수정
월성박씨의 중시조 박귀(朴龜, 1337~1404)와 그 후손 10명의 무덤이 모여 있는 묘역이다.
박귀는 고려의 무신이었는데,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는 인천에 은거하였다. 이후 ‘자신을 감춘다’는 뜻의 장아(藏我)를 자신의 호로 삼았고, 집의 뒷산을 장아산이라 불렀다.
장아산 서쪽 구릉에 자리 잡은 월성박씨 종중 묘역에는 박귀를 비롯해 그의 아들 박간(朴幹), 손자 박휘(朴徽), 증손자 박신겸(朴信謙)·박호겸(朴好謙)과 6대손 박홍중(朴弘中, 1582~1646) 등 월성박씨 인물 11명의 무덤이 있다. 그 중 박홍중은 조선 중기의 명사들과 폭넓게 교유한 문신이자 뛰어난 문장가였다.
현재 묘역에는 묘표, 문인석, 망주석 등의 여러 석물이 남아있으며, 조선 중기 사대부의 무덤 조성 양식을 보여준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 1
- 朴龜의 이름: 박귀 → 박구
- 수정이유: 龜가 이름에 쓰일 때 ‘귀’로 읽는 사례가 많지만, 지명과 이름에 쓰일 때는 ‘구’로 읽는 것이 옳은 것으로 배웠음. 예) 두보의 시 江南逢李龜年 - 강남봉이구년, 야구 해설가 許龜淵 - 허구연.
- ‘자신을 감춘다’는 뜻의 장아(藏我)를 자신의 호로 삼았고 → ‘자신을 감춘다’는 뜻의 장아(藏我)를 호로 삼았고 (‘자신의’ - 삭제)
- 수정이유: ‘자신’이 거듭 쓰여 문장이 부자연스러움.
- 남아있으며, → 남아 있으며,
- 수정이유: 관행상 붙여 써도 되지만, 띄어쓰기 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좋겠음.
- 분야별 자문위원 2
- ‘박구’를 ‘박귀’로 개정한 근거를 마련할 필요가 있음→현재 인터넷상으로 확인한 바로는 대부분 박구로 불림. 박귀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개정할 경우 분명한 근거를 제시하여 혼란이 없게 해야함
- 망경대의 설명을 추가하는 좋을 듯함 → “집의 뒷산을 장아산이라 불렀다. 장아산 망경대는 박귀가 산에 올라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바라보며 절하고 울던 곳이라 한다.”
- “박귀는 고려의 무신이었는데”→ “박귀는 고려의 중군사정부령을 역임하였는데”(근거 : 중군사정부령이라는 직책으로 무신이라 칭한 것으로 보이지만, 해당 관직이 반드시 무신이라 칭할수도 없음)
- “조선중기 사대부의 무덤 조성 양식을 보여준다”→“조선전기 사대부의 무덤 조성 양식을 보여준다”(조선중기의 시기 구분이 어디인가? 박휘, 박신겸, 박호겸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전기로 구분하는 것이 타당함)
-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이후 ‘자신을 감춘다’는 뜻의 장아(藏我)를 자신의 호로 삼았고, 집의 뒷산을 장아산이라 불렀다. -> ‘자신의’가 반복 장 -> 장아(藏我)를 호로 삼았고
- 현재 묘역에는 묘표, 문인석, 망주석 등의 여러 석물이 남아 있으며, 조선 중기 사대부의 무덤 조성 양식을 보여준다. -> 비문임. ~ 여러 석물이 남아 있으며, 이는 조선 중기 사대부 무덤의 조성양식을 보여준다 (밑줄 부분 교정함)
2차 수정
월성박씨의 중시조 박구(朴龜, 1337~1404)와 그 후손 10명의 무덤이 모여 있는 묘역이다.
박구는 고려의 중군사정부령을 역임하였는데,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는 인천에 은거하였다. 이후 ‘자신을 감춘다’는 뜻의 장아(藏我)를 호로 삼았고, 집의 뒷산을 장아산이라 불렀다. 장아산 망경대는 박구가 산에 올라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바라보며 절하고 울던 곳이라 한다.
장아산 서쪽 구릉에 자리 잡은 월성박씨 종중 묘역에는 박구를 비롯해 그의 아들 박간(朴幹), 손자 박휘(朴徽), 증손자 박신겸(朴信謙)·박호겸(朴好謙)과 6대손 박홍중(朴弘中, 1582~1646) 등 월성박씨 인물 11명의 무덤이 있다. 그 중 박홍중은 조선 중기의 명사들과 폭넓게 교유한 문신이자 뛰어난 문장가였다.
현재 묘역에는 묘표, 문인석, 망주석 등의 여러 석물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