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완주 화암사 우화루
2020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이 건물은 극락전의 정문과 같은 성격의 누문형식인데 정면만을 누문형식으로 하고 후면은 단층 건물로 한 반루각식으로 되어 있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광해군 3년(1611)에 세워진 것으로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수리되었으나 크게 변형되지는 않은 것 같다. 정면 지층의 기둥은 4칸이나 2층에서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다. 공포는 안과 밖이 모두 3출목형식의 다포집 양식이며, 공포부재의 조각 솜씨 등으로 보아 조선초기 양식이 가미된 느낌이 든다. 내부는 남쪽 중앙에 고주 2개를 세워 대들보를 그 위에 얹고 한쪽으로 이어진 퇴랑은 평주 위 공포에 얹게 하였다. 천정은 연등천정이며 대들보와 고주 위에서는 화반형식의 포작을 짜서 동자기둥의 기능을 하도록 하였다.
수정 국문
초고
이 건물은 극락전의 정문의 역할을 하는 누각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불탄 건물을 1611년 다시 지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쳤지만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우화루는 경사진 땅에 돌로 축대를 쌓고 그 앞에 기둥을 나란히 세워 마루를 놓았다. 그래서 절 입구를 향한 남쪽 방향은 2층 누각의 모습이지만, 반대쪽은 단층 건물로 되어 있다.
누각의 위층에는 ‘불명산화암사(佛明山花巖寺)’라는 편액이 걸려있으며, 아래층은 축대로 막혀 있어 건물 왼편에 별로도 나 있는 출입문을 지나야 경내에 진입할 수 있다.
남쪽 방향은 나무판자로 벽을 막고 창문을 내었지만, 극락전 방향은 문 없이 마당을 향해 뚫려 있다. 마당과 비슷한 높이에 마루를 구성하였으며 칸을 나누지 않은 하나의 공간으로 되어 있다. 양 옆으로 쌓은 흙벽에는 벽화의 흔적이 있고, 중앙에 ‘우화루’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 출입문 가까운 방향에 목어가 걸려있다. (사진으로 확인 가능) -> 우리나라에서 손 꼽히는 목어라고 함.
- 내부에 걸린 여러 편액 중 1873년 부모의 건강과 국가의 평안함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아 고종이 하사한 것이 있어 화암사의 원찰(願刹)로서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 화암사는 불명산 시루봉 남쪽에 있는 절로 본사인 금산사에 딸린 절이다. 절을 지을 당시의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원효와 의상이 유학하고 돌아와 수도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 문무왕 이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1981년 해체·수리 때 발견된 상향문에는 1297년에서 1307년 사이에 중창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초창은 그보다 앞선 시대로 추정되며, 조선 숙종 37년(1711)까지 여러번에 걸쳐 수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차 수정
우화루는 극락전 영역으로 진입하는 정문의 역할을 하는 누각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불에 타 1611년에 다시 지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쳤다.
우화루는 경사진 땅에 돌로 축대를 쌓고 그 앞에 기둥을 나란히 세워 마루를 놓았다. 그래서 절 입구를 향한 남쪽 방향은 2층 누각의 모습이지만, 반대쪽은 단층 건물로 되어 있다.
누각의 위층에는 ‘불명산화암사(佛明山花巖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으며, 아래층은 축대로 막혀 있어 건물 왼편에 별로도 나 있는 출입문을 지나야 경내에 진입할 수 있다.
남쪽 방향은 나무판자로 벽을 막고 창문을 내었지만, 극락전 방향은 문 없이 마당을 향해 뚫려 있다. 마당과 비슷한 높이에 마루를 구성하였으며 칸을 나누지 않은 하나의 공간으로 되어 있다. 양 옆으로 쌓은 흙벽에는 벽화의 흔적이 있고, 중앙에 ‘우화루’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1
- 문화재 명칭에 맞고 사실 관계에 비교적 부합된다.
- 용어사용도 비교적 절적하다.
- “우화루는 극락전 영역으로 진입하는 정문의 역할을 하는 누각이다.” → 우화루는 극락전 맞은편에 세워진 누각이다.
- “반대쪽은 단층 건물로 되어 있다.” → 극락전과 마주한 쪽은 단층건물이다.
- “누각의 위층에는” → 남쪽에서 보았을 때 위층에는
- “왼편에 별로도 나 있는” → 왼편에 별도로 나 있는
- “남쪽 방향은 나무판자로 벽을 막고 창문을 내었지만, 극락전 방향은 문 없이 마당을 향해 뚫려 있다. 마당과 비슷한 높이에 마루를 구성하였으며 칸을 나누지 않은 하나의 공간으로 되어 있다. 양 옆으로 쌓은 흙벽에는 벽화의 흔적이 있고, 중앙에 ‘우화루’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 남쪽 방향은 나무판자로 벽을 막고 창문을 내었지만, 극락전 방향은 문 없이 마당을 향해 뚫려 있으며 중앙에 ‘우화루’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마당과 비슷한 높이에 마루를 구성하였으며 내부는 칸이 나뉘지 않고 하나의 공간으로 되어 있다.
- 분야별 자문위원2
- 우화루는 극락전으로 진입하는 곳에 위치하며, 화암사의 정문 역할을 담당하는 누각이다.
- 1597년 정유재란 때 불에 탄 이후 1611년에 다시 지어진 것으로, 현재의 모습은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쳤다.
- 우화루는 경사진 땅에 돌로 축대를 쌓고 그 앞에 기둥을 나란히 세워 마루를 놓았다. 하부 정면에서는 4칸 구조로 절 입구를 향한 남쪽 방향에서는 2층의 누각 모습이지만, 배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건물의 모습을 가졌다. 아래층은 축대로 막혀 있어 건물 왼편에 별도로 나 있는 출입문을 지나야지만 경내로 진입할 수 있다. 누각 중앙에는 ‘불명산화암사(佛明山花巖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 공포는 안과 밖이 모두 3출목 형식의 다포식 맞배지붕으로, 천장은 서까래가 드러나 보이는 연등천장이다. 건물을 구성하는 가구가 노출되어 있어 누각의 세부 수법이 확인되며, 공포의 화려한 조각과 구조 등을 통해 조선초기 건축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 누각 내부에는 남쪽으로 2짝의 판장문을 창으로 달아 내었으나 북쪽으로는 문 없이 마당을 향해 뚫려 있는 구조이다. 마당과 비슷한 높이에 마루를 구성하였으며, 칸을 나누지 않은 하나의 공간으로 되어 있다. 동서 측벽에는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달마도와 함께 조선후기에 유행한 한산·습득도와 금강역사도가 벽화로 남아 있으며, 북쪽 중앙에는 ‘우화루’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2차 수정
우화루는 극락전 맞은편에 세워진 누각으로, 화암사의 정문의 역할을 담당한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불에 탄 이후 1611년에 다시 지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쳤다.
우화루는 경사진 땅에 돌로 축대를 쌓고 그 앞에 기둥을 나란히 세워 마루를 놓았다. 그래서 절 입구를 향한 남쪽 방향에서는 2층 누각의 모습이지만, 극락전과 마주한 쪽은 단층 건물이다. 아래층은 축대로 막혀 있어 건물 왼편에 별도로 나 있는 출입문을 지나야 경내로 진입할 수 있다. 누각 중앙에는 ‘불명산화암사(佛明山花巖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누각 내부의 남쪽은 나무판자로 벽을 막고 창문을 내었지만, 북쪽은 문 없이 마당을 향해 뚫려 있고 중앙에 ‘우화루’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마당과 비슷한 높이로 마루를 만들었으며, 칸이 나뉘지 않고 하나의 공간으로 되어 있다. 동서 측벽에는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달마도와 함께 조선 후기에 유행한 한산습득도와 금강역사도가 벽화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