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완주 위봉사 보광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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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이 건물은 조각 솜씨나 목재를 다듬은 기법으로 볼 때 조선 중기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법당 안에는 극락을 주관하는 석가모니불이 으뜸 부처로 있다. 좌우의 중심 기둥 사이에 칸막이벽을 세우고, 그 뒤에 흰옷을 걸친 관음보살상을 그렸다. 불상 왼쪽 벽에는 악기를 든 선녀를 비롯해 여러 인물을 묘사한 그림을 걸었고, 바둑판무늬로 짠 천장에는 연꽃을 그렸다. 이 그림들은 단청과 더불어 차분한 색조를 띠어 전체적으로 아늑한 느낌이 든다. 중요 부위마다 굵진한 목재를 사용하고 귀퉁이의 기둥도 높게 솟아 있어 건물 외양에서 웅장함이 느껴진다.
수정 국문
초고
보광명전은 석가여래를 본존불로 모시는 위봉사의 중심전각이다.
건물이 처음 지어진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며, 기와의 명문을 통해 1673년 보수되었던 사실이 확인되었다. 1838년 다시 보수하면서 제작한 현판이 지금까지 걸려있다.
현재 건물은 한국전쟁 이후 황폐화 되었던 위봉사를 중창하는 과정에서 1977년부터 2년간 해체 후 보수한 것이다.
이 건물은 후대의 수리로 일부 변형되기는 하였지만, 초기 다포의 특징을 지닌 불전으로 다포 형식의 시대적 변화 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붕의 무게를 안전하게 지탱하기 위해 기둥 위에 짜 맞춰놓은 부재들을 공포(栱包)라고 하고, 이러한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설치되어 있는 것을 다포(多包) 양식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모서리에서 외부로 돌출되는 부재의 일부가 생략되어 있는데, 이는 임진왜란 이전에 지어진 건물에서 확인되는 건축 양식이다.
내부에는 아미타삼존상이 모셔져 있고 불상 사이에 업경대 2점이 각각 자리하고 있으며, 불단 위에는 용과 여의주 등을 장식한 닫집이 설치되어 있다. 또 뒷벽의 백의관음도를 비롯해 주악비천도, 공양도 등 6점의 별지화가 있다.
또한 내부의 단청은 1673년에 조성된 것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어 동시대 단청 연구에 중요한 기준이 된다.
- 부속암자였던 북암이 1601년 중건되었고, 중건 당시 소실 이전의 건축 양식을 유지했던 것을 알려주는 기록이 남아있는 만큼, 더 큰 규모의 본찰인 위봉사는 1601년보다 앞선 시기에 재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 간화기법, 우미량의 사용, 양서의 형태, 평면 구성, 가구법 등이 다포의 초기 특징을 가지고 있다. -> 우미량은 단차가 있는 도리를 계단형식으로 상호 연결하는 곡선 모양의 부재이고, 간화기법은 건물 모서리에 자리하는 공포인 귀포를 구성하는 부재의 일부가 외부로 돌출되지 않고 생략되어 좌우대가 없는 형태로 완성하는 방식이다. 둘 다 다포 양식의 초기 단계에서 확인되는 건축 기법이다. 가구법은 건물을 지탱하는 기둥 중 가장 큰 단면의 부재인 내부 고주를 건물 중앙에 세워 지붕의 하중을 가장 많이 받게 하는 형태이다.
- 2009년에는 마루 등이 보수되었다.
- 위봉사는 604년 백제의 승려 서암 대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신라 말 최용각이라는 사람이 절터에서 봉황 세 마리의 흔적을 보고 이곳에 암자를 지어 위봉사라 이름했다는 설이 있다. 1359년 고려 나옹화상이 중창하였다고 전하는데, 이 당시 창건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1466에 석잠대사가 수리하였다고 한다. 조선 후기 위봉 산성과 산성 안에 지어진 행궁을 지키는 승영 사찰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31본산의 하나로 지정되기도 했던 큰 규모의 사찰이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되었다. 1977년 보광명전이 보물로 승격되면서 여러 전각들이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지붕의 네 추녀 밑에 하중을 분산하는 보조기둥인 활주를 두었다.
- 이곳에는 350여 매의 목판 경판이 소장되어 있었으며, 지금은 동국대학교 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1차 수정
보광명전은 석가여래를 본존불로 모시는 위봉사의 중심 전각이다.
건물이 처음 지어진 시기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으며, 기와의 명문을 통해 1673년 보수되었던 사실이 확인되었다. 1838년 다시 보수하면서 제작한 현판이 지금까지 걸려 있다. 현재 건물은 한국전쟁 이후 황폐화 되었던 위봉사를 중창하는 과정에서 1977년부터 2년간 해체 후 보수한 것이다.
내부에는 아미타삼존상이 모셔져 있고 불상 사이에 업경대 2점이 각각 자리하고 있으며, 불단 위에는 용과 여의주 등을 장식한 닫집이 설치되어 있다. 또 뒷벽의 백의관음도를 비롯해 주악비천도, 공양도 등 6점의 별지화가 있다. 내부의 단청은 1673년에 조성된 것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어 동시대 단청 연구에 중요한 기준이 된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1
- 문화재명칭에 부합하지만 사실관계가 틀리다. - ‘보광명전’이라는 명칭은 ‘비로자나불’을 봉안해야 하는 전각이다. 따라서 위봉사 보광명전에 ‘아미타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 이유가 설명되어야 한다.
- 용어 중 “업경대”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 “또 뒷벽의”에서 “뒷벽”은 “불단 뒷벽” 또는 “후불벽”으로 수정해야 한다.
- ‘조선중기이후의 건물이면서도 조선초기 건축수법을 간직하고 있어 의미 있다’는 점이 명기되어야 한다.
- 분야별 자문위원2
- 보광명전은 대웅전처럼 석가모니를 본존불로 모신 곳으로 위봉사의 중심 전각이다.
- 1718년 쓰여진 「추줄산위봉사사적사병서崷崒山威寺事蹟詞幷序」에 따르면 1359년 나옹화상이 중창하였으며, 당시 28개의 전각과 10여개의 암자를 함께 건립하여 고려 말 큰 가람을 이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보광명전이 처음 지어진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정유재란 때 피해를 입어 17세기 초 중창되었으며, 지붕에서 발견된 1673년 명문 기와와 1838년 제작된 「보광명전현판기普光明殿懸板記」을 통해 조선후기 수차례 보수되었음 알 수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77년 한국전쟁 이후 황폐화 되었던 위봉사를 중창하는 과정에서 해체 보수한 것이다.
-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중요 부위마다 굵은 목재를 사용하고 조각한 후, 화려한 단청과 벽화로 치장하여 건물 외양에서 웅장함이 느껴진다.
- 건물 내부에는 석가·문수·보현보살의 삼존상이 모셔져 있고 불상 사이에 불영패 2점이 각각 자리하고 있다. 불탁 위에는 1897년에 조성된 삼세후불도를 중심으로 용과 여의주 등으로 장식한 화려한 닫집이 설치되어 있다. 또 불탁 뒷벽과 좌우 벽체에는 백의관음도 1점과 주악비천도 6점이 있는데, 힘이 넘치는 필선과 인물 표현의 아름다움에서 조선후기 벽화의 우수성을 살펴 볼 수 있다.
2차 수정
보광명전은 위봉사의 중심 전각으로, 석가여래를 본존불로 모시고 있다.
처음 지어진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정유재란 때 피해를 입어 17세기 초에 중창되었고, 조선 후기에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현판은 1838년 보수 당시 제작한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한국전쟁 이후 황폐화되었던 위봉사를 중창하는 과정에서 1977년 보물로 지정되고 2년간 해체 후 보수한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중요 부위마다 굵은 목재를 사용하고 조각한 후, 화려한 단청과 벽화로 치장하여 건물 외양에서 웅장함이 느껴진다. 내부의 단청은 1673년에 조성된 것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어 동시대 단청 연구에 중요한 기준이 된다.
불단 위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시고 있으며, 용과 여의주 등으로 장식한 닫집이 설치되어 있다. 또 불단 뒷벽과 좌우 벽체에는 백의관음도 1점과 주악비천도 6점이 있는데, 힘이 넘치는 필선과 인물 표현의 아름다움에서 조선 후기 벽화의 우수성을 살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