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오리 이원익 종택 및 관감당(관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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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없음.

수정 국문

초고

조선 중기의 명재상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 1547∼1634)의 종택과 이원익이 만년에 머물렀던 사랑채이다. 이원익 종택은 사랑채인 관감당(觀感堂)과 사당인 오리 이원익 영우(影宇), 안채와 문간채로 구성되었다. 건물 모두 남향으로 동쪽에 안채와 문간채가 있으며, 서쪽에 관감당, 그 뒤편에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관감당은 1631년(인조 9) 인조가 하사한 집이다. 인조는 85세의 노신하가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는 초가에 살고 있다는 승지의 보고를 들고 이원익에게 새 집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신하와 백성들이 이를 보고 느끼라는 뜻에서 ‘관감(觀感)’이라고 하였다. 이원익은 관감당(觀感堂)에서 만년을 보내고 세상을 떴다.

관감당은 1637년, 병자호란으로 인해 소실되었다. 이후 이원익 서거 60주년이 되는 1694년(숙종 20)에 이원익의 고손(高孫) 이존도(李存道, 1659~1745)가 중건한 것으로 보이며(※ 확인 예정), 지금의 건물은 1916년 10대손 이연철(李淵哲)이 다시 세운 것이다.

1차 수정

관감당은 조선 중기의 명재상 이원익(梧里 李元翼, 1547∼1634)이 만년에 머물던 사랑채이다.

당시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던 이원익이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는 초가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인조(1623~1649 재위)는 1631년 이원익에게 새 집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신하와 백성들로 하여금 이원익의 청렴하고 간결한 생활 자세를 ‘보고 느끼게 하고자 한다’는 뜻에서 ‘관감(觀感)’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지금의 건물은 1916년 10대손 이연철(李淵哲)이 다시 세운 것이다. 중앙에 대청을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하였으며, 뒤쪽 칸에는 벽장, 고방을 두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이원익 사후에 병자호란으로 소실된 관감당은 숙종대 중수되었다고 다시 허물어졌던 것을 1916년 10대손 이연철(李淵哲)이 다시 세운 것이다.

--> 훼철시기와 재건시기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음.

  1. 분야별 자문위원 2
    • 명재상 -> 이름난 재상으로 수정
    • 간결한 생활자세를 -> 겸손한 생활자세를 으로 수정 (청렴함에 간결한의 의미도 포함되므로 겸손한 으로 수정요함)
  2.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당시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던 이원익이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는 초가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인조(1623~1649 재위)가 1631년 이원익에게 새 집을 내려주었다.

2차 수정

관감당은 조선 중기의 이름난 재상 이원익(梧里 李元翼, 1547∼1634)이 만년에 머물던 사랑채이다.

당시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던 이원익이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는 초가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인조(1623~1649 재위)가 1631년 이원익에게 새 집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신하와 백성들로 하여금 이원익의 청렴하고 겸손한 생활 자세를 ‘보고 느끼게 하고자 한다’는 뜻에서 ‘관감(觀感)’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지금의 건물은 1916년 10대손 이연철(李淵哲)이 다시 세운 것이다. 중앙에 대청을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하였으며, 뒤쪽 칸에는 벽장, 고방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