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영천 화남리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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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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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
불탑은 부처의 유골을 모신 조형물이다. 실제 유골이 없는 경우라 하더라도 상징적으로 부처를 모신 신성한 곳으로 여겨진다.
한광사에 있는 이 석탑은 삼층으로 쌓아올린 불탑이며, 동쪽과 서쪽에 하나씩 서있던 쌍탑 가운데 하나였다. 석탑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졌다. 1980년 이 탑을 해체하고 복원하는 과정에서 석조여래좌상이 발굴되어 보물 676호로 지정되었다.
한광사는 신라 문무왕대 창건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자세하지는 않다. 조선시대에는 터만 남아있었으나 158년 승려 최명도가 중창하였다.
1차 수정
불탑은 부처의 유골을 모신 조형물이다. 실제 유골이 없는 경우라 하더라도 상징적으로 부처를 모신 신성한 곳으로 여겨진다.
한광사에 있는 이 석탑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동쪽과 서쪽에 하나씩 서 있던 쌍탑 가운데 하나였다. 1980년 이 탑을 해체하고 복원하는 과정에서 석조여래좌상이 발굴되어 보물 676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석탑 오른쪽에 모셔져 있다.
한광사는 신라 문무왕대 창건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자세한 역사는 알려지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는 터만 남아 있었으나 1958년 승려 최명도가 중창하였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1
- 영천 화남리사지에는 동·서 삼층석탑과 석조여래좌상, 광배편, 석등재 등 석조유물이 남아 있으며, 1958년 신축한 한광사가 자리하고 있다. 석탑은 동·서 탑 중 서탑 만이 영천 화남리 삼층석탑(보물 제675호)으로 지정되어 있다. 서탑은 1984년 해체보수 이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며, 동탑은 12매의 부재만 남아 있던 것을 2010년 이후 복원한 것이다. 두 탑은 부재의 크기 등이 거의 유사하여 원래 쌍탑으로 조성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 서탑은 높이 3.38m이며, 이중기단을 갖추고 있다.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면석, 갑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 사지의 두 삼층석탑은 기단부의 양식 및 규모 등으로 보아 9세기 이후에 조성된 탑으로 추정되며, 쌍탑으로 조성된 점으로 보아 ‘장흥 보림사 남·북 삼층석탑(국보 제44호)’, ‘김천 청암사 수도암 동·서 삼층석탑(보물 제297호)’ 등과 유사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 분야별 자문위원2
- 탑의 조형상의 특징이 보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탑 기단부 안에 불상이 봉안된 사례는 매우 특이한 사례로서 이에 대한 보충설명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불탑은 부처의 유골을 모신 조형물이다. 실제 유골이 없는 경우라 하더라도, 상징적으로 부처를 모신 신성한 곳으로 여겨진다. → 부처의 유골을 봉안한 일종의 무덤(墓)이며, 실제 유골이 없어도 부처를 상징하는 조형물로 신성시 해왔다.
- 한광사에 있는 이 석탑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동쪽과 서쪽에 하나씩 서 있던 쌍탑 가운데 하나였다. 1980년 이 탑을 해체하고 복원하는 과정에서 석조여래좌상이 발굴되어 보물 676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석탑 오른쪽에 모셔져 있다. → 이 탑은 현재 한광사에 자리하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쌍탑 조성의 문화환경 속에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1980년에 탑을 해체 복원할 때 석조여래좌상이 발굴되어 탑의 오른쪽에 봉안되었고 보물 676호로 지정되었다.
2차 수정
불탑은 부처의 유골을 모신 조형물이다. 실제 유골이 없는 경우라 하더라도 상징적으로 부처를 모신 신성한 곳으로 여겨진다.
이 석탑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에는 사찰의 금당 앞에 동탑과 서탑을 함께 배치하는 쌍탑씩 가람배치가 유행하였는데, 이 석탑도 쌍탑 가운데 하나였다. 서탑만 1980년 보물 제675호로 지정된 후 1984년 해체보수 하였고, 동탑은 12매의 부재만 남아 있던 것을 2010년 이후에 다시 세웠다.
탑을 해체하던 중 기단부에서 석조여래좌상이 발굴되어 보물 제676호로 지정되었다.
이 탑이 위치한 곳은 신라 문무왕 때 창건된 사찰이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58년 한광사가 새로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