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영덕 시암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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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없음.

수정 국문

초고

이 건물은 남진만(1697~1773)이 생활하기 위해 지은 집이다. 이후 후손 남교성(南敎成)이 친척인 남고(南皐,1807~1879, 호: 時庵)에게 매각하였다. 남고의 후손이 현재까지 관리하고 있다.

남고는 19세기 영남학파의 큰 스승인 류치명의 문인이자 의병장 남경훈의 후손이다. 평소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힘을 쏟았다. 혼인과 함께 독립을 위해 이 집을 구매하였다.

시암고택은 18세기 무렵 건립되어 19세기에 중수되었으나 크고 작은 보수로 인해 변화되어 건축적 가치는 다소 미흡하다. 1959년 태풍 사라로 인해 침수 피해를 당해 크게 보수하기도 했다. 하지만 19세기 지역적 특색을 보여주는 건축 양식을 지니고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1차 수정

이 건물은 남진만(1697~1773)이 생활하기 위해 지은 집이다. 이후 후손 남교성(南敎成)이 친척인 시암 남고(時庵 南皐, 1807~1879)에게 매각하였으며, 남고의 후손이 현재까지 관리하고 있다.

남고는 19세기 영남학파의 큰 스승인 류치명(柳致明, 1777~1861)의 제자이자 의병장 남경훈(南慶薰, 1572~1612)의 후손이다. 평소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힘을 쏟았으며, 혼인하면서 이 집을 구매하였다.

시암고택은 18세기 무렵 건립되어 19세기에 중수되었으나, 이후 크고 작은 보수로 인해 원형이 많이 변화되었다. 1959년 태풍 사라로 피해를 입어, 크게 보수하기도 했다. 하지만 19세기 지역적 특색을 보여주는 건축 양식을 지니고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1
    •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사랑방과 사랑마루를 두고 그 뒤로 중방을 두어 사랑공간을 “ㄱ"字 형태로 구성했고 왼쪽에는 마구와 곳간을 두었다.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 안방과 정지(아궁이와 솥이 있는 공간)을 두고 우측에는 윗방(상방)을 따라 통래칸(通來間)과 곡식을 저장하는 도장, 중방과 연결하여 전체적으로 ㅁ형의 뜰집을 완성하고 있다.
  2. 분야별 자문위원2
    • 시암고택은 남진만(南震萬, 1697~1773)이 처음 지었다. 남진만의 후손 남교성(南敎成)이 친척 남고(南皐, 1807~1879)에게 매각하여, 남고의 후손이 현재까지 거주하며 관리하고 있다.
    • 시암고택은 몸채와 익랑, 행랑이 연결된 ㅁ자형 평면이다. 별도로 사당이 있다. 몸채는 중간에 대청을 두고 좌‧우에 방을 두었다. 사랑채를 독립시키지 않고 행랑 우측 부분에 사랑방과 사랑마루를 구획하였다.
    • 몸채는 팔작지붕이고 익랑과 행랑은 소박한 맞배지붕이다. 몸채와 익랑이 같은 높이에서 만나는 반면, 익랑과 행랑은 층차를 두고 연결하였다. 시암고택의 절충식 구조는 19세기 영덕 지역의 건축적 특징을 잘 표현한다.
  3.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1959년(1959년->1959년에는) 태풍 사라로 피해를 입어, 크게 보수하기도 했다. 하지만(하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지역적 특색을 보여주는 건축 양식을 지니고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2차 수정

이 건물은 남진만(南震萬, 1697~1773)이 생활하기 위해 지은 집이다. 이후 후손 남교성(南敎成)이 친척인 시암 남고(時庵 南皐, 1807~1879)에게 매각하였으며, 남고의 후손이 현재까지 관리하고 있다.

남고는 19세기 영남학파의 큰 스승인 류치명(柳致明, 1777~1861)의 제자이자 의병장 남경훈(南慶薰, 1572~1612)의 후손이다. 평소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힘을 쏟았으며, 혼인하면서 이 집을 구매하였다.

시암고택은 몸채와 익랑, 행랑이 연결된 ㅁ자형 평면이고, 집 뒤편에 사당이 있다. 몸채는 중간에 대청을 두고 양옆에 방을 두었다. 사랑채를 따로 짓지 않고, 행랑 우측 부분에 사랑방과 사랑마루를 구획하였다. 1959년 태풍 사라로 피해를 입어, 크게 보수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지역적 특색을 보여주는 건축 양식을 지니고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