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영덕 만송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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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없음.

수정 국문

초고

만송당은 1827년 권상두가 선조인 권경(權璟, 1604~1666, 호: 대은)의 학문과 덕업을 기리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집안에 대대로 전해지는 학문을 전수하는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공부한 학자 가운데 한말 위정척사운동과 의병에 참여한 애국지사가 많이 배출되었다.

권경은 안동권씨 가운데 영덕에 처음 들어온 시조인 권책(權策)의 6세손이다. 평소 고매한 기상을 지닌 선비로 알려졌다. 권책은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 권씨의 조카였다. 세조가 즉위하고 집안이 사육신사건에 연루되면서 피난하여 영덕으로 이주하였다.

만송당 바로 옆에 권경이 지은 ‘대은종택(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78호)’이 있다.

1차 수정

만송당은 1827년 권상두가 선조인 권경(權璟, 1604~1666, 호: 대은)의 학문과 덕업을 기리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집안에 대대로 전해지는 학문을 전수하는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공부한 학자 가운데 한말 위정척사운동과 의병활동에 참여한 애국지사가 많이 배출되었다.

권경은 안동권씨 가운데 영덕에 처음 들어온 시조인 권책(權策)의 6세손으로, 평소 고매한 기상을 지닌 선비로 알려졌다. 권책은 문종(재위 1450∼1452)의 비인 현덕왕후(顯德王后, 1418~1441)의 조카였다. 세조가 즉위하고 집안이 사육신사건에 연루되면서 피난하여 영덕으로 이주하였다.

만송당 바로 옆에 권경이 지은 대은종택(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78호)이 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1
    • 중앙의 1칸은 대청으로, 양쪽의 각 1칸은 온돌방으로 하였고 본체 전면에 퇴칸과 난간마루(헌함)를 두었다. 동측방에는 북측벽으로 감실을 두었다.
  2. 분야별 자문위원2
    • 만송당을 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해 조사한 김희곤 위원과 조재모 전문위원의 보고가 상이함. 김희곤 위원은 권상두가 1827년에 지었다고 보고하였으나, 조내모 전문위원은 권상두는 1867년에 태어났으므로 1827년에 권상두가 지었다는 것은 성립할 수 없다고 하고, 권경이 처음 짓고, 1889년에 중건하였다고 보고하였음.
    • 만송당은 정각이라는 점에서 ‘위정척사운동과 의병활동에 참여한 애국지사가 많이 배출’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아 보임. 김희곤 위원도 “만송당이 독립운동의 거사 장소로 직접 활용된 내용은 전해지지 않음”이라고 하였음.
    • 이상의 상충되는 내용의 옳고 그름을 확정할 필요가 있음. 자문자가 보기에는 조재모 전문위원의 보고가 사실과 부합한다고 생각됨.
    • 만송당은 학자 권경(權璟, 1604~1666) 처음 지었으며, 지금 건물은 1889년에 중건한 것이다. 이곳에서 공부한 인물 가운데 한말 위정척사운동과 의병활동에 참여한 애국지사가 많이 배출되었다.
    • 만송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집으로 중앙 1칸은 대청으로, 양쪽의 각 1칸은 온돌방으로 하였다. 전면에는 퇴칸을 두고 난간을 설치하였다.”

2차 수정

만송당은 1827년 권상두가 선조인 권경(權璟, 1604~1666, 호: 대은)의 학문과 덕업을 기리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권경은 안동권씨 가운데 영덕에 처음 들어온 시조인 권책(權策)의 6세손으로, 평소 고매한 기상을 지닌 선비로 알려졌다.

만송당이 집안 대대로 전해지는 학문을 전수하는 공간으로 사용되면서, 이곳에서 공부한 인물 가운데 한말 위정척사운동과 의병활동에 참여한 애국지사가 많이 배출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1889년에 중수한 것이다.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이 하나씩 있고, 전면에는 퇴칸을 두고 난간을 설치하였다. 만송당 바로 옆에 권경이 지은 대은종택(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78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