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연평부원군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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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효종 1년(1650)에 세운 연평부원군 이귀(李貴, 1557~1633)의 신도비이다. 선생은 인조반정(1623)의 주역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봉되었으며, 사후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신도비문은 조익이 짓고 오준이 글씨를 썼다. 글을 새긴 비신(碑身)과 비 머리[螭首]는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두 마리의 용과 구름을 조각한 비 머리는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있다. 귀부는 머리를 앞으로 내민 자라 형태로 표현기법이 투박하다.

묘소는 부인 인동 장씨와 합장묘로 신도비 북서쪽 계성산 능선에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운 비석을 가리킨다. 이 비는 조선 후기의 문신인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 1557-1633)의 업적을 기리는 비이다.

이귀는 이이(李珥, 1536-1584)와 성혼(成渾, 1535-1598)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특히 글 솜씨로 유명하였다. 1582년(선조 15) 생원시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지방의 군사를 모집하는 직책을 맡아 나라를 구하는데 힘썼다. 이후 1603년(선조 3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지냈다.

1623년(인조 1)에는 김류(金瑬, 1571-1648) 등과 함께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반정을 성공시켜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책록 되었으며, 후에 연평부원군에 봉해졌다. 정묘호란 때에는 왕을 강화도에 호종하였는데, 최명길(崔鳴吉, 1586-1647)과 함께 화의를 주장하다가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두 차례의 전란과 당쟁, 그리고 명·청 관계의 외교가 복잡한 시기에 나라를 위한 그의 공헌이 컸기 때문에, 공로를 인정받아 죽은 이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이후 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충정(忠定)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650년(효종 1)에 건립된 이 신도비는 화강암 석재로 되어 있으며, 거북받침대 위에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머릿돌과 비몸이 올려져 있다. 머릿돌의 구름과 용 무늬는 쌍용이 다투는 듯한 형상을 사실적으로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으며, 거북받침대는 목 표현이 생략된 채, 거북목을 수평으로 내밀어 자라 머리를 하고 있다.

비몸의 전후 양면에 글씨를 새겼는데, 조익(趙翼, 1579-1655)이 비문을 짓고, 글씨는 오준(吳竣, 1587-1666)이 썼다. “贈議政府領議政延平府院君諡忠定李公神道碑銘(증의정부영의정 연평부원군 시충정 이공 신도비명)”이라 되어 있는 전서(篆書)는 여이징(呂爾徵, 1588-1656)이 썼다.

1차 수정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으로, 대개 무덤 앞이나 무덤의 남동쪽에 세운다. 신도(神道)는 신(神)이 묘역에 이르는 길을 뜻한다.

이 신도비는 조선시대의 문신인 연평부원군 이귀(延平府院君 李貴, 1557~1633)를 기리기 위해 효종 1년(1650)에 세워졌다.

이귀는 이이(李珥, 1536~1584)와 성혼(成渾, 1535~1598)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특히 글솜씨로 유명하였다. 선조 15년(1582) 생원시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지방의 군사를 모집하는 직책을 맡아 나라를 구하는 데 힘썼다. 이후 선조 36년(1603)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지냈다. 인조 1년(1623)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공을 인정 받아 1등 공신이 되었으며 후에 연평부원군에 봉해졌다. 정묘호란 때에는 강화도로 피난하는 왕을 호종하였고, 화의를 주장하다가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두 차례의 전란과 당쟁, 그리고 명·청 관계의 외교가 복잡한 시기에 나라를 위한 그의 공헌이 컸기 때문에,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이귀의 신도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머릿돌의 구름과 용 무늬는 두 마리의 용이 다투는 듯한 형상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비문은 조익(趙翼, 1579~1655)이 짓고, 오준(吳竣, 1587~1666)이 글씨를 썼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 신도비는 정2품 이상의 관원의 묘에 세우는 것으로 조선에서 제도화 되었습니다. 이 내용을 반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 연평부원군의 문집으로 “李忠定公章疏”가 있다는 내용도 포함되면 좋겠습니다.
    • 나머지 내용은 적절합니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운 것으로, 대체로 무덤 앞 혹은 남동쪽에 세웠다.이 신도비는 조선시대 문신 연평부원군 이귀(延平府院君 李貴, 1557~1633)를 기리기 위해 1650년(효종 1)에 세운 것이다.
      이귀는 이이(李珥, 1536~1584)와 성혼(成渾, 1535~1598)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뛰어난 문장력을 인정받았다. 1582년(선조 15) 생원시 합격 후 관직에 나갔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나라를 구하는 데 힘썼다. 1603년(선조 36) 문과에 급제한 이후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1등 공신으로 연평부원군에 책봉되었다. 정묘호란 때에는 강화도로 피난하는 왕을 호종하였고, 화의를 주장하다가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두 차례의 전란과 당쟁, 명·청 사이의 복잡한 외교가 전개되던 시기에 세운 공이 인정되어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신도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두 마리의 용이 다투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는 머릿돌의 구름과 용무늬는 상당히 생동감 넘친다. 비문은 조익(趙翼, 1579~1655)이 짓고, 글씨는 오준(吳竣, 1587~1666)이 썼다.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전체 단락 수가 많으므로 처음 제시되는 두 단락을 한 단락으로 합칠 것 ->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으로, 대개 무덤 앞이나 무덤의 남동쪽에 세운다. 신도(神道)는 신(神)이 묘역에 이르는 길을 뜻한다. (단락 연결할 것) 이 신도비는 조선시대의 문신인 연평부원군 이귀(延平府院君 李貴, 1557~1633)를 기리기 위해 효종 1년(1650)에 세워졌다.

2차 수정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으로, 대체로 무덤 앞이나 무덤의 남동쪽에 세웠다. 신도(神道)는 신(神)이 묘역에 이르는 길을 뜻한다.

이 신도비는 조선시대의 문신인 연평부원군 이귀(延平府院君 李貴, 1557~1633)를 기리기 위해 효종 1년(1650)에 세워졌다.

이귀는 이이(李珥, 1536~1584)와 성혼(成渾, 1535~1598)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뛰어난 문장력으로 유명하였다. 선조 15년(1582) 생원시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지방의 군사를 모집하는 직책을 맡아 나라를 구하는 데 힘썼다. 선조 36년(1603) 문과에 급제한 이후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인조 1년(1623) 인조반정 1등 공신으로 연평부원군에 책봉되었다. 정묘호란 때에는 강화도로 피난하는 왕을 호종하였고, 화의를 주장하다가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두 차례의 전란과 당쟁, 그리고 명·청 사이의 복잡한 외교가 전개되던 시기에 세운 공이 인정되어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신도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머릿돌의 구름과 용 무늬는 두 마리의 용이 다투는 듯한 형상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비문은 조익(趙翼, 1579~1655)이 짓고, 오준(吳竣, 1587~1666)이 글씨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