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안동 토계동 계남고택
2021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이 건물의 건축연대는 미상이지만 양식으로 보아 1800년대로 추정된다. 계남이라는 당호(堂號)는 하계의 남쪽에 위치한다는 뜻이다. 이 집은 목조기와의 ‘口’자형 홑처마집으로 정면 7칸, 측면 7칸의 규모이다.
안동지방의 일반적인 주택의 형태를 따르고 있지만 기둥의 간격이 다른 건물에 비해 넓은 편이다. 큰사랑과 작은사랑이 따로 있으며 뜰 아랫방에 따로 부엌이 있어서 2~3대가 함께 살기에 알맞게 구성되어 있다. 원래는 마당 끝에 행랑채가 있어서 몸채를 감싸듯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1975년 이 곳으로 이건하였다.
수정 국문
초고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의 8세손 이귀용이 지어 살던 집이다. 건물의 건축연대는 미상이지만 양식으로 보아 1800년대로 추정된다. 계남이라는 당호(堂號)는 하계의 남쪽에 위치한다는 뜻이다.
본디 사랑 마당 끝에‘ㄱ’자형의 행랑채가 몸채를 감싸듯 배치되어 있었는데 6·25전쟁 직전 소실되었다고 한다. 원래 도산면 토계동에 있다가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기에 이르러 1975년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7칸의 완전한 ‘ㅁ’자형이다. 자연석 쌓기를 한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운 간략한 민도리 형식으로 가구하여 홑처마에 팔작지붕을 얹었다. 안동지방의 일반적인 주택 형태를 따르고 있지만 기둥의 간격이 다른 건물에 비해 넓은 편이다. 안채는 안뜰에 면한 전면(前面)이 5칸이나 되기 때문에, 왼쪽에 안방이 2칸을 점하고도 오른쪽에 6칸 대청을 마련할 수가 있었다. 큰사랑과 작은사랑이 따로 있으며 뜰아랫방에 따로 부엌이 있어서 2~3대가 함께 살기에 알맞게 구성되어 있다.
※ 이귀용에 대한 정보(한자, 생몰년)을 찾을 수 없음.
초고 수정
이 집은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의 8세손 이귀용이 토계동에 정착한 후 지은 살림집이다. 언제 지어졌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건축 기법으로 보아 180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ㅁ’자형의 평면으로 지어진 건물은 사랑채, 안채, 중간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래 사랑채 마당 끝에 행랑채가 몸채를 감싸듯 배치되어 있었다고 하나, 한국전쟁을 전후해 소실되었다고 한다.
건물의 가장 안쪽에 자리한 안채는 왼쪽에 온돌방을 꾸미고 오른쪽에 넓은 대청을 두었으며, 앞으로는 툇마루를 달았다.
이 집은 내부로 진입할 수 있는 중문의 오른편에 큰사랑방과 대청이 있고, 우익사 쪽으로 작은사랑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으며, 안채에 딸린 부엌 외에 아랫방에도 부엌을 따로 두는 등 여러 대가 함께 살 수 있도록 공간을 설계한 것이 돋보인다. 안동지방의 일반적인 주택 형태를 따르고 있지만, 당시에 지어진 다른 건축물에 비해 기둥 간격이 넓은 편이다.
본래 도산면 토계동에 있었는데, 안동댐 건설로 인해 1975년 안동시 도산면 단천리로 이건되었으며, 2008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다.
- 계남고택은 현재 7채의 고택을 모아 운영되는 전통 리조트의 객실로 활용되고 있다. 리조트 영역의 가장 앞에 자리한다. (전통 리조트 구름에 사이트 참조)
- 집의 이름은 도산면의 여러 마을 중 하계(下溪)의 남쪽에 위치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