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안동 원촌동 치암고택
2020 한중연 안내문안 작성
기존 국문
이 집은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극심한 분노와 실망으로 병을 얻어 세상은 떠난 치암(恥巖) 이만현(李晩鉉)의 집이다.
19세기 후반 조선 고종(高宗)대에 지어진 것으로 ‘口’자형 22칸으로 안채 지붕보다 사랑채 지붕이 더 높은 것이 특색이다. 사랑채의 왼쪽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오른쪽은 팔작지붕이어서 균형이 맞지 않는다. 안방에만 큰 부엌이 있고, 대문채에 사랑부엌을 겸해서 군불을 넣거나 소죽을 끓이는데 필요한 시설을 갖추었다.
사랑채에는 온돌방과 마루방, 누마루, 툇마루가 있어서 공간이 세분화된 인상을 준다.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1976년 도산면 원천리에서 이 곳으로 옮겼다.
수정 국문
초고
이 집은 치암 이만현(恥岩 李晩鉉, 1832~1911)의 고택이다. 이만현은 1910년(융희 4)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자 그 울분과 비통으로 병이 생겨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이만현의 본관은 진성이며, 이황(李滉, 1501~1570)의 11대손이다. 1876년(고종 13) 문과에 급제하고 언양현감, 홍문관 교리 등을 지냈다. 1881년 홀어머니의 상을 당하고,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이후 나라가 혼란하자 출사하지 않고 원촌동으로 낙향하였다.
치암고택은 19세기 후반 고종 대에 지은 집이다. 전체 22칸의 口자형 기와집으로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이다. 치암고택은 사랑채 지붕이 안채보다 높고, 사랑채 왼쪽 지붕은 맞배지붕이지만 오른쪽 지붕은 팔작지붕인 비대칭구조가 특징이다. 원래 안동군 도산면 원촌동에 있었으나 안동댐 수몰로 인해 1976년 4월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1차 수정
이 집은 치암 이만현(恥岩 李晩鉉, 1832~1911)이 살던 집이다.
이만현은 이황(李滉, 1502~1570)의 11대손이다. 1876년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지냈으나, 1882년 임오군란 이후 나라가 혼란하자 고향인 원촌동으로 낙향하였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자 그 울분과 비통으로 병이 생겨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치암고택은 19세기 후반에 지은 집이다. 원래 도산면 원촌동에 있었으나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1976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대문채, 사랑채, 안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는 왼쪽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오른쪽 지붕은 팔작지붕인 흔치 않은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