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안동 용계리 은행나무
2021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이 은행나무의 수령은 약 700년이며 높이는 37m, 가슴높이의 둘레가 14.5m이다. 은행나무는 한자어로 행자목(杏子木), 공손수(公孫樹), 압각수(鴨脚樹) 등으로 불린다. 원래 용계초등학교 운동장에 있었으나,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나무가 수몰되는 것을 염려하여 그 자리에서 15m 높이로 들어 올려 놓은 것이다. 줄기 굵기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선조(宣祖) 때 훈련대장(訓鍊大將)을 역임한 송암(松菴) 탁순창(卓順昌)이 임진왜란이 끝나고 이곳에 낙향하여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 은행계를 만들어 이 나무를 보호하고 친목을 도모하였다고 한다.
수정 국문
초고
은행나무는 약 2억 7천만 년 전부터 지구에 살기 시작했으며, ‘살아있는 화석’이라 불린다. 한국, 중국, 일본 등에 분포하고 있다. 넓은 그늘을 만들어서 마을 입구의 정자나무나 가로수로 많이 심는다.
용계리의 은행나무는 수령이 700년 이상으로 추정된다. 두 개의 큰 줄기가 양쪽으로 휘어진 형태의 이 나무는 높이 37m, 가슴높이 둘레 14.5m이다.
원래 용계초등학교 운동장에 있었는데,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될 위기에 처했던 것을 3년에 걸쳐 15m 높이로 들어 올려 다시 심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이 나무는 오랫동안 마을의 신목(神木)으로 숭상되었으며, 나무와 관련한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국가에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울음소리를 낸다고도 하고, 조선 선조(宣祖, 재위 1576-1608) 때 훈련대장이었던 탁순창(卓順昌)은 고향으로 내려온 후 이 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계(契)를 만들고, 매년 7월 나무 밑에 모여 친목을 나누었다고 한다.
주민 단합을 이루게 하는 상징물로서의 가치가 크고, 우리 선조들이 나무를 사랑하고 보호한 것을 알 수 있는 자료이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 줄기 굵기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임진왜란 때 뒷산인 약산봉수대를 지키던 봉수꾼 여남은 명이 왜병에게 쫓기어 마을로 내려와 이 나무에 올라 숨었다. 뒤쫓아 온 왜병은 숨은 봉수꾼을 보지 못하고 나무그늘에서 쉬었다 떠났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 은행나무는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국치(國恥)를 못내 서러워하여 울었고, 6.25한국전쟁 때도 울었다고 전한다. / 원래 은행나무는 암수가 서로 마주 보아야만 열매를 맺는다고 하는데 용계리에는 수나무가 없다. 그런데 암나무만으로 한 해 은행을 서른 말가량 수확하였다 한다. 이는 나무 아래 맑은 냇물이 있어 그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수나무로 착각하여 결실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 탁순창은 안동 출신으로, 안동에 그의 사당인 세덕사가 있다.
1차 수정
은행나무는 약 2억 7천만 년 전부터 지구에 살기 시작했으며, ‘살아있는 화석’이라 불린다. 넓은 그늘을 만들어서 마을 입구의 정자나무나 가로수로 많이 심는다.
용계리의 은행나무는 수령이 약 700년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나무가 물에 잠길 위기에 처하자, 1990년 11월부터 1993년 7월까지 원래 나무가 있던 자리에 흙을 15m 높이로 쌓아 올리고 다시 심었다. 줄기의 굵기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굵은 은행나무였으나, 다시 심는 과정에서 가지 대부분이 잘려서 원래의 규모를 잃었다. 나무의 높이는 31m, 가슴높이 둘레는 13.7m, 수관의 폭은 동서방향이 26.9m, 남북방향이 27.3m이다.
이 나무는 오랫동안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여겨졌으며, 나라에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울음소리를 냈다고도 한다. 안동 출신의 훈련대장이었던 탁순창(卓順昌)은 임진왜란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이 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계(契)를 만들고 나무 밑에 모여 친목을 나누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나무의 크기와 수령은 『문화재대관(2009)』의 내용을 참고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