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안동 예안이씨 와룡파 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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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없음.

수정 국문

초고

이 집은 예안이씨(禮安李氏) 와룡파 후손들이 살던 종택으로, 풍산지역 입향조인 이영(李英, 1482~?)의 셋째 아들 이대인(李大仁)이 결혼 후 처가가 있는 이 마을로 들어와 살게 된 1570년 무렵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종택이란 한 문중에서 맏이로 이어 온 가족이 대대로 사용해온 집을 말한다.

집은 ‘ㅁ’자형의 평면으로 되어 있으며, 사랑채 대청 외의 모든 공간에 벽을 세워 페쇄된 형태이다. 경사가 급한 대지에 계단 형태로 여러 단의 축대를 쌓은 후 그 위에 집을 지어 올렸는데, 모든 공간이 하나의 지붕으로 연결되어 있다.

집의 정면에 위치한 사랑채는 왼쪽에 대청을, 오른쪽에 온돌방을 두었다. 앞쪽으로 퇴칸을 내고 난간을 둘러 살짝 돌출되도록 했다.

집의 가장 안쪽에 자리한 안채는 중앙의 대청을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다. 안채의 향좌측에는 부엌이 있고, 향우측에는 안채 마당에 출입할 수 있는 중문이 마련되어 있다.

대문과 양쪽 익사(翼舍) 모두 상부에 다락을 설치해 공간 활용을 극대화했다.

이 마을은 예부터 ‘말바위 마을[말바우골]’로 불려왔으며, 이 집도 마을의 이름을 따 ‘마암(馬巖)’ 종택으로 불리기도 한다.

  • 집의 건축과 관련한 내용은 블로거의 기록을 참고한 것이므로 지자체 확인 필요. / 이대인이 청주정씨 마을 입향조 정두의 딸과 결혼할 때 정두가 이 집과 땅을 마련해주었다는 이야기도 있음(청주정씨 후손 이야기 https://blog.daum.net/kil0930/59 참조)
  • 이영은 1519년 기묘사화 때 신진사류들이 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1545년 을사사화 때라는 설명도 있음) 동생 이전(李筌)과 이훈(李薰)을 데리고 현재의 풍산읍 하리리로 이거하였다.
  • 다락이 발달한 것이나 용도와 기능에 따라 구획한 사랑방과 건너방의 간살 잡이는 눈여겨 볼만한 부분이다.
  • 축대 하단부는 근래에 시멘트로 보강된 것으로 보인다.
  • 안동문화대전 ‘오헌’과 집의 정면 사진이 같고, 국가문화유산포털에 있는 사진 중 ‘오헌’이라는 현판이 달린 사진이 있어 헷갈림(시정 필요). 향문 설명에 따르면 오헌은 1670년(현종 11) 이성일(李星逸, 1633~1709)이 후진 양성을 위하여 건립한 정자이며, 이 집의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언덕에 오르면 사당과 함께 있다고 함. / 블로그 설명에 따르면 이 집에 살았던 사람이기도 함.

1차 수정

예안이씨 와룡파 종택은 예안이씨 안동 입향조인 이영(李英, 1482~?)의 셋째 아들 이대인(李大仁)이 결혼 후 처가가 있는 이 마을로 들어와 살게 된 1570년 무렵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마을은 예부터 ‘말바위 마을[말바우골]’로 불려왔으며, 이 집도 마을의 이름을 따 ‘마암(馬巖)’ 종택으로 불리기도 한다.

집은 ‘ㅁ’자형의 평면으로 되어 있으며, 경사가 급한 대지에 계단 형태로 여러 단의 축대를 쌓은 후 그 위에 집을 지었다. 모든 공간이 하나의 지붕으로 연결되어 있고, 사랑채 대청 외의 모든 공간에 벽을 세워 폐쇄적인 형태를 보인다.

정면에 위치한 사랑채는 왼쪽에 대청을, 오른쪽에 온돌방을 두었다. 앞쪽으로 퇴칸을 내고 난간을 둘러 살짝 돌출되도록 했다. 가장 안쪽에 자리한 안채는 중앙에 대청을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다. 안채의 왼쪽에는 부엌이 있고, 오른쪽에는 안채 마당에 출입할 수 있는 중문이 마련되어 있다. 대문과 양쪽 익사(翼舍) 모두 상부에 다락을 설치해 공간 활용을 극대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