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안동 영양남씨 재사
2022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이 건물은 영양남씨 송곡파(松谷派)인 둔재(屯齋) 남창년(南昌年)의 후손들이 조선 순조(純祖) 26년(1826)에 건립했다고 한다. 재사는 묘소를 지키고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마련된 살림집으로 현재 영남지방에 다수 남아 있다.
남창년은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스승이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자 안동으로 낙향하였다. 그 후 부령교수(富寧敎授)를 역임하였는데 저서로는『성경도설(誠敬圖說)』등이 있었으나 전하지 않는다.
가옥은 주변에 담장이 없는 ‘口’자형 건물로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청 위쪽의 가구수법과 뒷벽의 창호 등은 옛스러운 격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합각 마루와 추녀 마루의 망와(望瓦)에는 명문(銘文)이 남아 있어 이 재사의 건축시기를 알려 주고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이 건물은 조선시대의 문신 남창년(南昌年, 1463~?)의 후손들이 선조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조선 순조 26년(1826)에 건립한 재사이다.
남창년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로 꼽히는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제자였는데, 스승이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자 고향인 안동으로 낙향하였다.
건물은 ‘ㅁ’자형 구조로 되어 있으며, 특히 중정 건너에 있는 대청의 대들보와 천장부의 가구, 뒷벽 창호 등이 옛 기법으로 다듬어져 있다.
- 재사가 있는 안동 일직면은 영양남씨의 세거지이다.
- 재사에 걸려 있는 편액에 적힌 ‘둔재’는 남창년의 호이다.
- 건물 전면은 중문을 기준으로 왼쪽에 마굿간과 부엌이, 오른쪽에 온돌방이 배치되어 있다. 중정 건너에 대청이 있고, 대청의 왼쪽 날개채에는 온돌방과 부엌이, 오른쪽 날개채에는 온돌방이 배치되어 있다.
1차 수정
영양남씨 재사는 조선시대의 문신 남창년(南昌年, 1463~?)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영양남씨 후손들이 순조 26년(1826)에 건립하였다. 영양남씨는 14세기 중엽 남휘주(南輝珠, 1326~1372)가 안동 지역에 정착한 이후, 와룡면, 일직면, 풍산읍 일대에 대대로 살고 있다.
남창년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로 꼽히는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제자였는데, 스승이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에 연루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재사는 주변에 담장이 없는 ‘ㅁ’자형 건물이다. 건물 앞면에는 중문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마굿간과 부엌이, 오른쪽에는 온돌방이 있다. 중문과 마주 보는 위치에 대청이 있고, 대청의 왼쪽 날개채에는 온돌방과 부엌이, 오른쪽 날개채에는 온돌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