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서울 이준 묘소
2021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없음.
수정 국문
초고
일제 강점기 애국 계몽 운동가 및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이준(李儁, 1858~1907)의 묘소이다.
이준은 고종 24년(1887) 과거의 1차 시험인 초시에 합격한 이후 여러 요직을 지냈다. 고종 32년(1895)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가 일본 자객들에 의해 시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발생하였고, 다음해에 고종 황제(재위: 1863~1907)가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나자,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한 이후로는 여러 독립단체들에서 활동하였으며 대한제국의 독립과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乙巳條約)을 강제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다수의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상소문을 짓고,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07년 6월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었다. 고종 황제는 비밀리에 이준, 이상설(李相卨, 1870~1917), 이위종(李瑋鍾, 1887~미상)을 특사로 파견하여, 을사조약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조약으로 무효라는 것을 전 세계에 선언하고, 한국독립에 관한 열국의 지원을 요청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회의 참석 시도는 일제의 방해로 저지당하였고, 각국 대표들에게 문서를 보내었으나 반응은 냉담하였다. 이에 격분하여 이준은 통분을 누르지 못하고 헤이그에서 순국하였다. 이후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1963년에는 헤이그에서 유해를 옮겨와 국민장으로 이곳에 안장하였으며, 부인 이일정(李一貞, 1876~1935)의 묘도 함께 조성하였다.
이곳에는 이준의 부조상이 묘역의 중앙 제단과 태극기 조각 뒤 화강암 담장에 새겨져 있다. 오른쪽에 고종 황제의 헤이그특사 밀지와 박정희 대통령의 “순국대절(殉國大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큰 절개)”의 필적이 새겨져 있고, 왼쪽 벽에는 이준 열사의 필적이 새겨져 있다. 묘소에 이르는 길 좌우에는 그의 사상과 애국심을 담은 어록이 새겨진 청동판 기념비가 서있으며, 입구에 홍살문과 자유평화수호상이 설치되어 있다.
1차 수정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애국계몽운동가인 이준(李儁, 1859~1907)의 묘소이다.
이준은 함경남도 북청 출신으로, 1887년 과거의 1차 시험인 초시에 합격한 이후 여러 관직을 지냈다. 1895년 한국 최초의 근대적 법률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한성재판소 검사보가 되었으나, 탐관오리들의 모함을 받아 두 달 만에 그만두게 되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법과에 입학하였으며, 1898년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뒤에는 독립협회를 비롯한 여러 독립단체에서 활동하였으며 대한제국의 독립과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상소문을 짓고,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자, 고종은 비밀리에 이준, 이상설(李相卨, 1870~1917), 이위종(李瑋鍾, 1887~미상)을 특사로 파견하였다.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을사조약은 무효라는 것을 전 세계에 선언하고, 한국독립에 관한 열국의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일제의 방해 때문에 세 특사는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였고, 각국 대표들에게 문서를 보내었으나 반응은 냉담하였다. 이에 이준은 통분을 누르지 못하고 헤이그에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헤이그에 묻혀 있던 이준의 유해는 1963년 국민장으로 이곳에 안장하였다.
묘역 중앙 제단 뒤의 담장에는 이준의 부조상이 새겨져 있다. 부조상 오른쪽에는 고종이 내린 헤이그 특사 밀지와 박정희 대통령의 “순국대절(殉國大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큰 절개)” 필적이 새겨져 있고, 왼쪽에는 이준 열사의 필적이 새겨져 있다. 담장 왼편에는 부인 이일정(李一貞, 1876~1935)의 묘가 조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