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서울 앨버트 테일러 가옥(딜쿠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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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없음.

수정 국문

초고

이 건물은 1919년 3.1 독립선언과 일제의 제암리 학살사건을 전 세계에 알린 앨버트 테일러(Albert Wilder Taylor, 1875~1948)와 그의 아내(Mary Linely Taylor, 1889~1982)가 1923년에 지은 집이다. 인도여행 시 ‘딜쿠샤(DILKUSHA)’라는 건물에 감명을 받은 테일러 부부는 집의 이름도 딜쿠샤라고 했다. 딜쿠샤는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앨버트 테일러는 미국 네바다 출신으로 아버지를 이어 평안도 운산금광을 운영했다. 1897년 조선에 온 그는 3.1운동 당시 AP통신사의 특파원으로 활동했다. 갓 태어난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있었던 세브란스 병원에서 3.1독립선언서를 입수하자 ‘서울에서 한국이 독립을 선언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작성하여 1919년 3월 13일 『뉴욕타임즈』에 실었다. 또한 같은 해 4월 제암리 학살사건의 참상과 일본군의 잔악행위를 직접 취재하여 『뉴욕타임즈』와 『재팬 애드버타이저』에 고발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이듬해 본국으로 추방당했으며, 1948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언대로 아내는 1948년 한국에 와서 앨버트 테일러를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역에 안장했다.

앨버트 테일러 가옥은 지하 1층·지상 2층 건물로, 화강석 기단 위에 붉은 벽돌로 쌓은 집이다. 각 층은 응접실과 식당, 침실, 서재 등 다양한 용도의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1924년 완공되었으나, 1926년 화재로 큰 피해를 입어 1930년 재건공사를 완료하였다. 1942년 앨버트 부부가 떠난 후 방치되었다가 1959년 조경규가 매입했으며, 1963년 조경규의 재산몰수로 국가 소유로 귀속되었다. 1991년 대한매일신보의 사옥으로 오인되었으나, 2006년 브루스 테일러가 방한하여 딜쿠샤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1차 수정

딜쿠샤(DILKUSHA)는 미국 출신의 언론인이자 기업인인 앨버트 테일러(Albert Wilder Taylor, 1875~1948)와 그의 아내 메리 린리 테일러(Mary Linely Taylor, 1889~1982)가 1924년에 지은 집이다. 딜쿠샤는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이며, 메리 테일러가 인도 북부 러크나우를 여행할 당시 감명 깊게 보았던 궁전의 이름에서 따왔다.

앨버트 테일러는 평안북도에서 운산금광을 운영하던 아버지를 돕기 위해 1897년에 조선에 왔다. 1919년부터는 AP통신사의 특파원으로 활동하며 고종의 국장, 3.1 독립선언, 일제의 제암리 학살사건 등을 취재하여 전 세계에 알렸다. 그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갓 태어난 아들 브루스 테일러(Bruce Taylor, 1919~2015)가 있었던 세브란스병원에서 간호사들이 인쇄된 독립선언서를 숨기는 것을 목격하였고 3.1운동을 취재하게 되었다고 한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조선총독부에 의해 이듬해 미국으로 추방당했으며 1948년 세상을 떠났다. 평소 죽어서라도 한국에 가고 싶다고 했던 남편의 유언에 따라, 메리 테일러는 1948년 앨버트 테일러를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역에 안장했다.

딜쿠샤는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로, 화강석 기단 위에 붉은 벽돌로 쌓은 집이다. 각 층에는 응접실, 식당, 침실, 서재 등 다양한 용도의 공간이 있었고, 지하에는 장작, 석탄, 포도주를 보관하였다. 1923년에 착공하여 1년 만에 완공되었으나, 1926년 화재로 큰 피해를 입어 1930년 재건공사를 완료하였다. 1942년 테일러 부부가 떠난 후 방치되었다가 1959년 당시 자유당 의원이었던 조경규(1904~1983)가 매입했으며, 1963년 조경규의 재산이 몰수됨에 따라 딜쿠샤도 국가 소유가 되었다. 이후 빈민들의 공동주택으로 사용되며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고, 이 집의 역사도 점차 잊혀졌다. 그러던 중 2006년 한국을 방문한 브루스 테일러가 딜쿠샤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으며, 2016년부터 복원 사업이 추진되어 2020년 일반에 공개되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문화재 명칭이 맞고, 사실관계가 객관적임
    • 초안에‘AP통신사’로 기재되어 있으며, 이전 자료 등에 의하면 ‘UPI 통신사’로 알려져 있음 사실 관계 재확인 요함.
    • 문화재 가치 및 의미가 정리되어 표현됨
  2. 분야별 자문위원 2
    • 이후 빈민들의 이 집의 관리가 소홀해진 사이,
  3.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안내문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는 <딜쿠샤>가 무슨 뜻인지부터 쓴 다음 누가 이 건물을 지었는지 그 소개가 그 다음에 나오는 게 효과적입니다.
    • 최대한 불필요한 조사 등을 없애는 게 좋은데 ‘0000년에 조선에 왔다’같은 표현의 경우 ‘에’를 삭제 하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읽는데도 전혀 불편하지 않고, 바로 뒤에 또 ‘에’가 붙으니까요.
    • 안내문은 가급적 구어가 읽기 편합니다. ‘조선총독부에 의해~’같은 문어적인 표현은 가독성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긴 문장을 더 복잡하게 합니다. 읽기 편하게 수정해주는 게 좋습니다.
    • 딜쿠샤는 그 외형이 독특한데, 건축적인 특징을 소개하는 정보가 들어가는 게 효과적일 것입니다.
    • 마지막 단락은 정보가 장황합니다. 외형적인 건축특징과 원래 모습, 서민주거공간으로 변한 이후 변형됐다는 정보를 압축하고 길이를 줄이는게 더 좋을 듯 합니다.

2차 수정

딜쿠샤(DILKUSHA)는 미국 출신의 언론인이자 기업인인 앨버트 테일러(Albert Wilder Taylor, 1875~1948)와 그의 아내 메리 린리 테일러(Mary Linely Taylor, 1889~1982)가 1924년에 지은 집이다. 딜쿠샤는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이며, 메리 테일러가 인도 북부 러크나우를 여행할 당시 감명 깊게 보았던 궁전의 이름에서 따왔다.

앨버트 테일러는 평안북도에서 운산금광을 운영하던 아버지를 돕기 위해 1897년 조선에 왔다. 1919년부터는 AP통신사의 특파원으로 활동하며 고종의 국장, 3.1 독립선언, 일제의 제암리 학살사건 등을 취재하여 전 세계에 알렸다. 그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갓 태어난 아들 브루스 테일러(Bruce Taylor, 1919~2015)가 있었던 세브란스병원에서 간호사들이 인쇄된 독립선언서를 환자들의 침대 밑에 숨기는 것을 목격하였고 3.1운동을 취재하게 되었다고 한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조선총독부에 의해 이듬해 미국으로 추방당했으며 1948년 세상을 떠났다. 평소 죽어서라도 한국에 가고 싶다고 했던 남편의 유언에 따라, 메리 테일러는 1948년 앨버트 테일러를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역에 안장했다.

딜쿠샤는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로, 화강석 기단 위에 붉은 벽돌로 쌓은 집이다. 각 층에는 응접실, 식당, 침실, 서재 등 다양한 용도의 공간이 있었고, 지하에는 장작, 석탄, 포도주를 보관하였다. 1923년에 착공하여 1년 만에 완공되었으나, 1926년 화재로 큰 피해를 입어 1930년 재건공사를 완료하였다. 1942년 테일러 부부가 떠난 후 방치되었다가 1959년 당시 자유당 의원이었던 조경규(1904~1983)가 매입했으며, 1963년 조경규의 재산이 몰수됨에 따라 딜쿠샤도 국가 소유가 되었다. 이후 이 집의 관리가 소홀해진 사이, 공동주택으로 사용되며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고, 이 집의 역사도 점차 잊혀졌다. 그러던 중 2006년 한국을 방문한 브루스 테일러가 딜쿠샤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으며, 2016년부터 복원 사업이 추진되어 2020년 일반에 공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