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산청 조식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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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조선시대의 대표적 사상가이자 대학자인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 선생의 유적이다. 선생의 자는 건중楗仲,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남명이다. 선생은 1501년 현재의 합천군 삼가에서 태어났다. 30세가 되던 해에는 처가가 있는 김해金海 신어산神魚山 아래에 산해정山海亭을 지어 학문을 연구하고 강론하였고, 48세부터는 삼가에 뇌룡정雷龍亭을 지어 찾아오는 제자들을 가르쳤다.

조정에서 선생에게 단성현감丹城縣監 등 10여 차례 이상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과감한 비판과 임금의 잘못된 정치에 대하여 직언으로 상소하는 등 나라와 백성에 대한 강한 애정을 드러내었다.

61세 때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산천재山川齋를 지어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72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뒤에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하고 문정文貞이란 시호를 내렸다.

여기에는 남명선생과 관련된 산천재, 덕천서원德川書院 세심정洗心亭 묘소墓所 신도비神道碑, 여재실如在室 등의 사적이 있다.

산천재는 선생이 만년에 강학한 장소로 마루 위 벽에는 허유소부도許由巢父圖 등 선생의 처사정신을 기리는 3정의 벽화가 있다. 덕천서원은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1576(선조 9)년에 덕산서원德山書院으로 창건하여 1609년 덕천서원으로 사액賜額받았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6년 복원하였다. 세심정은 덕천서원 앞 강가에 있으며 학문하는 여가에 휴식하는 장소이다. 묘소는 산천재 뒷산에 있는데, 선생이 생전에 직접 자리 잡은 곳이다. 신도비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비문을 지었는데, 남명기념관 경내에 있다.

여재실은 문중에서 제사를 지내는 가묘家廟로 서원의 사당과 대비하여 별묘別廟라고 일컫기도 한다.

수정 국문

초고

이곳은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에 있는 조선전기 학자 조식(曺植, 1501~1572) 관련 유적 일대를 가리킨다. 조식 유적은 두 곳으로 나뉘는데 사리(絲里)에는 산천재(山天齋), 조식묘, 별묘(別廟), 신도비(神道碑), 묘비 등이 있고, 원리(院里)에는 덕천서원(德川書院)과 세심정이 있다.

산천재는 조식이 제자들을 가르친 곳으로, 1561년(명종 16)에 건립하였는데, 이곳에서 정구(鄭逑, 1543~1620), 김우옹(金宇顒, 1540~1603), 곽재우(郭再祐, 1552~1617) 등 100여 명의 학자를 배출하였다. 이후 이곳은 조식의 문집을 간행하는 책판(冊板)을 판각하고 간행하는 장소로 활용되었으며 현재는 185매의 책판을 소장하고 있다. 산천재에서 100m쯤 가면 조식묘가 나오는데 조식묘을 둘러싸고 별묘, 신도비, 묘비 등이 군집해 있다. 묘비는 성혼(成渾, 1535~1598)이 쓴 것이고, 신도비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쓴 것이다.

덕천서원은 조식이 강학하던 곳에 그의 제자들이 세운 서원이다. 일반적으로 서원은 제향(祭享) 공간, 강학(講學) 공간, 유식(遊息) 공간으로 구분된다. 제향공간은 덕천서원의 가장 안쪽에 자리 잡은 숭덕사(崇德祠)이고, 강학공간은 서원 중간에 있는 경의당(敬義堂)이며 유식공간은 서원 남쪽 냇가에 있는 세심정(洗心亭)이라는 정자이다. 다만, 지금의 덕천서원을 구성하고 있는 건물들은 1926년에 복원한 것이다.

1차 수정

조식 유적은 조선시대의 학자인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과 관련된 유적 일대를 가리킨다.

조식은 지금의 합천군 삼가면 출신으로 아버지가 과거에 급제하면서 서울로 옮겨가 살았다.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하였으며, 명종 16년(1561) 산청 지역으로 이주하여 산천재(山天齋)라는 강학당을 짓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일상생활에서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당시의 사회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비판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조식 유적은 두 곳으로 나뉘는데 사리에는 조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산천재와 조식의 묘, 신도비, 묘비, 사당 등이 있고, 원리에는 덕천서원(德川書院)과 세심정(洗心亭)이 있다.

산천재는 정구(鄭逑, 1543~1620), 김우옹(金宇顒, 1540~1603), 곽재우(郭再祐, 1552~1617) 등 100여 명의 학자를 배출하였다. 이후 이곳은 조식의 문집을 간행하는 장소로 활용되었으며, 현재 185매의 책판을 소장하고 있다. 산천재에서 100m쯤 떨어진 곳에 조식의 묘소가 있으며, 묘소 주변에 신도비, 묘비, 사당 등이 모여있다.

덕천서원은 선조 9년(1576) 조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그가 강학하던 자리에 세운 서원이다. 광해군 원년(1609) 사액을 받았으나 고종 7년(1870)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고, 1930년대에 복원되었다. 경내에는 사당인 숭덕사(崇德祠)와 강학당인 경의당(敬義堂) 등이 있다. 서원 남쪽 냇가에 있는 세심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이 정자는 조식 생전에도 있었다고 한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조식 유적은 조선시대의 학자인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과 관련된 유적 일대를 가리킨다.
      조식은 지금의 합천군 삼가면 출신으로 아버지가 과거에 급제하면서 서울로 옮겨가 살았다.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하였으며, 명종 16년(1561) 산청 지역으로 이주하여 산천재(山天齋)라는 강학당을 짓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일상생활에서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당시의 사회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비판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조식 유적은 두 곳으로 나뉘는데 사리에는 조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산천재와 조식의 묘, 신도비, 묘비, 사당 등이 있고, 원리에는 덕천서원(德川書院)과 세심정(洗心亭)이 있다.
      산천재는 정구(鄭逑, 1543~1620), 김우옹(金宇顒, 1540~1603), 곽재우(郭再祐, 1552~1617) 등 100여 명의 학자를 배출하였다. 이후 이곳은 조식의 문집을 간행하는 장소로 활용되었으며, 현재 185매의 책판을 소장하고 있다. 산천재에서 100m쯤 떨어진 곳에 조식의 묘소가 있으며, 묘소 주변에 신도비, 묘비, 사당 등이 모여있다.
      덕천서원은 선조 9년(1576) 조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그가 강학하던 자리에 세운 서원이다. 광해군 원년(1609) 사액을 받았으나 고종 7년(1870)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고, 1926년에 새로 지었다. 경내에는 사당인 숭덕사(崇德祠)와 강당인 경의당(敬義堂)이 있다. 서원 남쪽 냇가에 있는 세심정(洗心亭)이라는 조식 생전에도 있었다고 하는 정자가 있는데, 지금의 건물은 최근에 다시 세운 것이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 수정사항 없음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조식 유적은 조선시대의 학자인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과 관련된 유적 일대를 가리킨다.
      조식은 지금의 합천군 출신으로, 아버지가 과거에 급제하면서 서울로 옮겨가 살았다. 이후 그는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하였으며, 명종 16년(1561) 고향인 산청으로 돌아와 산천재(山天齋)라는 강학당을 짓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일상생활에서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당시의 사회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비판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조식 유적은 사리와 원리 등 두 곳에 남겨져 있다. 사리에는 조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산천재와 조식의 묘, 신도비, 묘비, 사당 등이 있고, 원리에는 덕천서원(德川書院)과 세심정(洗心亭)이 있다.
      산천재는 정구(鄭逑, 1543~1620), 김우옹(金宇顒, 1540~1603), 곽재우(郭再祐, 1552~1617) 등 100여 명의 학자를 배출하였다. 이후 이곳은 조식의 문집을 간행하는 장소로 활용되었으며, 현재 185매의 책판을 소장하고 있다. 산천재에서 100m쯤 떨어진 곳에 조식의 묘소가 있으며, 묘소 주변에 신도비, 묘비, 사당 등이 모여 있다.
      덕천서원은 선조 9년(1576) 조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그가 강학하던 자리에 세운 서원이다. 광해군 원년(1609) 사액을 받았으나 고종 7년(1870)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고, 1930년대에 복원되었다. 경내에는 사당인 숭덕사(崇德祠)와 강학당인 경의당(敬義堂) 등이 있다. 서원 남쪽 냇가에 있는 세심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이 정자는 조식 생전에도 있었다고 한다.

2차 수정

조식 유적은 조선시대의 학자인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과 관련된 유적 일대를 가리킨다.

조식은 지금의 합천군 삼가면 출신으로 아버지가 과거에 급제하면서 서울로 옮겨가 살았다.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하였으며, 명종 16년(1561) 산청 지역으로 이주하여 산천재(山天齋)라는 강학당을 짓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일상생활에서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당시의 사회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비판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조식 유적은 사리와 원리 두 곳에 남겨져 있다. 사리에는 조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산천재와 조식의 묘, 신도비, 묘비, 사당 등이 있고, 원리에는 덕천서원(德川書院)과 세심정(洗心亭)이 있다.

산천재는 정구(鄭逑, 1543~1620), 김우옹(金宇顒, 1540~1603), 곽재우(郭再祐, 1552~1617) 등 100여 명의 학자를 배출하였다. 이후 이곳은 조식의 문집을 간행하는 장소로 활용되었으며, 현재 185매의 책판을 소장하고 있다. 산천재에서 100m쯤 떨어진 곳에 조식의 묘소가 있으며, 묘소 주변에 신도비, 묘비, 사당 등이 모여 있다.

덕천서원은 선조 9년(1576) 조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그가 강학하던 자리에 세운 서원이다. 광해군 원년(1609) 사액을 받았으나 고종 7년(1870)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고, 1926년에 새로 지었다. 경내에는 사당인 숭덕사(崇德祠)와 강당인 경의당(敬義堂)이 있다. 서원 남쪽 냇가에 있는 세심정이라는 정자는 조식 생전에도 있었다고 하며, 지금의 건물은 최근에 다시 지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