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목사 김효성의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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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조선시대 공주 목사였던 김효성(1585~1651)의 선정(善政)을 기리기 위하여 1828년(순조 28)에 세운 비이다.

원래 옥룡동에 있었으나 현재 위치로 옮겨 놓았다.

비몸[碑身]과 머릿돌[螭首]은 원래 모습이지만 거북모양의 받침[龜趺]은 비를 옮기는 과정에서 없어져 사각형 받침으로 대신하였다. 김효성은 본관이 광주(光州)이며, 1623년 인조반정 후 의금부도사를 거쳐 청주 목사와 공주 목사를 지냈다.

수정 국문

초고

조선 중기의 문신인 김효성의 비이다.

비석은 높이 약 2m의 화강암으로, 표면은 오랜 세월의 풍화로 인해 변색이 심하다. 공산성 서문 내 43개 비석군 중 유일하게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모두 갖춘 비석이었지만, 옥룡동 비선거리 부근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기는 과정에서 비몸[碑身]과 머릿돌[螭首]은 원래 모습을 유지하였으나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龜趺]이 사라져 사각형의 대좌로 대신하였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행적으로 인해 선정비가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비석 전면에 쓰인 ‘목사심공효성청간선정무휼군졸비(牧使金公孝誠請簡善政撫恤軍卒碑)’라는 구절로 보아 특히 공주목의 군사문제에 선정을 베풀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효성의 본관은 광주로 자는 행원(行源)이다. 그는 1615년(광해군 7)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정조, 윤인, 이위경 등이 인목대비를 해치려고 하자 이를 탄핵하였는데, 이 때문에 길주와 진도에 유배되었다. 인조반정으로 관직을 되찾아 의금부도사를 지냈으며 청안현감이 되었고, 이후 남원, 죽산의 부사와 공주, 청주의 목사 등을 두루 지냈다. 오랜 외직생활동안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으며, 청렴하고 강직한 목민관으로 이름을 떨쳤다.

초고 수정

이 비석은 공주목사로서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김효성(金孝誠, 1585-1651)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순조 28년(1828)에 세워졌다.

김효성은 광해군 5년(1613)에 과거에 합격하였으며, 1615년에 인목대비(仁穆大妃, 1584-1632)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유배를 당했으나 인조반정(1623)으로 복권된 후 여러 벼슬을 역임했다. 외직생활동안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으며, 청렴하고 강직한 목민관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가 공주목사로 부임한 것은 인조 22년(1644)이다.

비석은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올린 형태이며, 오랜 시간에 걸친 풍화로 인해 변색되었다.

본래 옥룡동에 있었는데, 지금의 자리인 공산성 서문 금서루 안쪽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기존의 거북 모양 받침돌이 사라져 사각형 받침돌로 대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면에 쓰인 ‘목사심공효성청간선정무휼군졸비(牧使金公孝誠請簡善政撫恤軍卒碑)’라는 구절로 보아 특히 공주목의 군사문제에 선정을 베풀었던 것으로 보인다.

1차 수정

이 비석은 공주목사로서 선정을 베풀었던 김효성(金孝誠, 1585~1651)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순조 28년(1828)에 세워졌다.

김효성은 광해군 5년(1613)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광해군 7년(1615)에 인목대비(仁穆大妃, 1584~1632)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길주와 진도에 유배되었다. 인조반정(1623) 이후 관직을 되찾았으며, 중앙에서 여러 벼슬을 지내다가 이어 남원, 죽산, 공주, 청주 등에서 외직을 두루 지냈다. 그가 공주목사로 부임한 것은 인조 22년(1644)이다. 오랜 외직 생활 동안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으며,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이름을 떨쳤다.

김효성의 비는 원래 옥룡동에 있었고 거북 모양의 받침돌,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자리인 공산성 서문 안쪽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거북 모양 받침돌이 사라져 사각형 받침돌로 대신하게 되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비문의 내용을 확인할 수 없어서 구체적 내용을 지적할 수 없습니다. 현장에 방문하면 비문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문을 누가 언제 썼는지, 비를 세우자고 건의한 사람들은 누구인지, 김효성의 구체적 치적은 무엇이었는지 등을 보충해서 보는 이들의 이해를 도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기술된 내용은 김효성의 행적에 집중되었을 뿐 공주목사로서의 치적, 비문의 저자 등에 관한 정보는 전혀 제공되지 않았기에 말씀드립니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 비는 공주목사 역임 시 선정을 베풀었던 김효성(金孝誠, 1585~1651)을 기리기 위해 1828년(순조 28)에 세워졌다.
      김효성은 1613년(광해군 5)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615년(광해군 7) 인목대비(仁穆大妃, 1584~1632)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길주와 진도에 유배되었다. 인조반정(1623년)으로 관직을 되찾은 이후, 중앙과 지방의 다양한 관직을 두루 지냈다. 1644년(인조 22) 공주목사로 부임한 이후 청빈한 목민관으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으며,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이름을 떨쳤다.
      처음 옥룡동에 세워질 당시에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졌으나, 공산성 서문 안쪽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거북 모양 받침돌이 사라져 사각형 받침돌로 대신하였다.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어휘 풀이 제시 -> 폐위(왕이나 왕비 등을 자리에서 몰아내다)를 반대하다가 길주와 진도에 유배(형벌의 일종으로 먼 시골이나 섬으로 일정기간 제한되 곳에서만 살게함)되었다.

2차 수정

이 비는 공주 목사로서 선정을 베풀었던 김효성(金孝誠, 1585~1651)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순조 28년(1828)에 세워졌다.

김효성은 광해군 5년(1613)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광해군 7년(1615)에 인목대비(仁穆大妃, 1584~1632)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길주와 진도에 유배되었다. 인조반정(1623) 이후 관직을 되찾았으며, 중앙과 지방의 다양한 관직을 두루 지냈다. 인조 22년(1644) 공주목사로 부임한 이후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으며,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이름을 떨쳤다.

처음 옥룡동에 세워질 당시에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자리인 공산성 서문 안쪽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거북 모양 받침돌이 사라져 사각형 받침돌로 대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