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남해 전 백이정 묘

Heritag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2021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이 돌무덤[石塚]은 고려 말의 대학자인 이재(紛齋) 백이정(白頤正, 1247~1323) 선생의 묘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그러나 기록이 없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그 사실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 설령 선생의 묘라 하더라도 어떤 연유로 이곳에 선생의 묘가 세워졌는지 정확한 사연을 알 수 없다. 선생이 살았던 당시는 원(元)나라의 간섭이 심했던 시기로, 부자간에도 왕위쟁탈전이 벌어질 정도로 혼란이 극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 남해 지방으로 왔다가 죽은 뒤에 이곳에 묻히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다만 이곳의 돌무덤과 주변의 돌담이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돌담 쌓기 양식인 엇물림식 돌쌓기로 되어 있어, 고려시대 사람의 묘라는 것은 분명하다. 선생은 안향(安珦)의 문인(門人)으로, 1298년(충렬왕 24)에 원나라에 들어가 10년 동안 머물며,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안향이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들여왔다고 한다면, 그것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크게 활성화시킨 사람이 바로 선생이었다. 이처럼 안향에게서 선생한테 전해진 우리나라 성리학은 이후 이제현(李齊賢), 박충좌(朴忠佐)를 통해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에게 전해지고, 다시 조선의 권근(權近)과 변계량(卞季良)에게 이어졌다. 현재 남해군 이동면 난음마을에 있는 난곡사(蘭谷祠)에는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수정 국문

초고

경상남도 남해군 남면 평산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유학자 이재(彛齋) 백이정(白頤正, 1247∼1323)의 묘이다. 백이정은 고려 충렬왕 1년(1275)에 문과에 급제하여 충렬왕 24년(1298)에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 연경에 가서 학자들과 교류하였으며 10년 간 성리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의 문인으로는 이제현(李齊賢, 1287~1367), 박충좌(朴忠佐, 1287~1349) 등이 있으며 조선의 성리학은 이들을 거쳐 이색(李穡, 1328~1396), 정몽주(鄭夢周, 1337~1392)에게 전해졌다.

경상남도 남해군 남면 평산리 망기산의 우지막골은 수백 년간 ‘백정승의 묘’라고 전해 내려오는 곳으로 봉분은 전면이 5.7m, 측면이 4.7m, 후면이 4.6m, 높이 2.1m로 평평하고 긴 바위 등으로 사방에 담장을 둘렀다. 담장 축조수법이 고려시대 성곽 축조 수법과 비슷하여 그 시대의 기법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1차 수정

고려시대의 유학자인 백이정(白頤正, 1247~1323)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곳이다.

백이정은 1284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여러 관직을 지냈다. 1298년에는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 연경에 가 10년 동안 머물면서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그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安珦, 1243~1306)의 제자이며,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많은 제자를 가르쳐 성리학을 널리 보급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봉분 주위에는 평평한 바위로 담장이 둘러져 있고 바닥에는 자연석을 깔았다. 묘역 주변으로는 소나무가 우거져 있으며, 산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계단식으로 쌓은 석축이 있다. 봉분을 쌓아 올린 돌이나 주변 담장을 쌓은 수법이 고려시대의 성곽 축조법과 비슷하다.

남해 난음리에는 백이정을 기리는 사당인 난곡사(蘭谷祠)가 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없음
  2. 분야별 자문위원 2
    • 이곳은 1284년(충렬왕 10) 문과에 급제한 이후 여러 관직을 지냈던 고려시대 유학자 백이정(白頤正, 1247~1323)의 무덤으로 전해진다. 백이정은 1298년(충렬왕 24)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 서울(연경)에 들어가 10년 동안 머물면서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안향(安珦, 1243~1306)의 제자로, 본격적인 연구와 제자 양성을 통해 고려 후기 성리학의 보급과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다.
      봉분 주위에는 평평한 바위로 담장이 둘러져 있고 바닥에는 자연석이 깔려 있다. 주변에 소나무가 우거져 있으며, 산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계단식으로 쌓은 석축이 있다. 봉분을 쌓아 올린 돌이나 주변 담장을 쌓은 수법이 고려시대 전형적인 성곽 축조법과 비슷하다. 남해 난음리에는 백이정을 기리는 난곡사(蘭谷祠)가 있다.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고려시대의 유학자인 백이정(白頤正, 1247~1323)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곳이다.
      백이정은 1284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여러 관직을 지냈다. 1298년에는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 연경으로 가서, 10년 동안 머물면서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그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安珦, 1243~1306)의 제자이며,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많은 제자를 가르쳐 성리학을 널리 보급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봉분 주위에는 평평한 바위로 담장이 둘러져 있고 바닥에는 자연석을 깔았다. 묘역 주변으로는 소나무가 우거져 있으며, 산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계단식으로 쌓은 석축이 있다. 봉분을 쌓아 올린 돌이나 주변 담장을 쌓은 수법이 고려시대의 성곽 축조법과 비슷하다.
      남해 난음리에는 백이정을 기리는 사당인 난곡사(蘭谷祠)가 있다.

2차 수정

고려시대의 유학자인 백이정(白頤正, 1247~1323)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곳이다.

백이정은 1284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여러 관직을 지냈다. 1298년에는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 연경으로 가서, 10년 동안 머물면서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그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安珦, 1243~1306)의 제자이며,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많은 제자를 가르쳐 성리학을 널리 보급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봉분 주위에는 평평한 바위로 담장이 둘러져 있고 바닥에는 자연석이 깔려 있다. 주변에 소나무가 우거져 있으며, 산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계단식으로 쌓은 석축이 있다. 봉분을 쌓아 올린 돌이나 주변 담장을 쌓은 수법이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성곽 축조법과 비슷하다.

남해 난음리에는 백이정을 기리는 사당인 난곡사(蘭谷祠)가 있다.

지자체 감수결과

고려시대의 유학자인 백이정(白頤正, 1247~1323)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곳이다.

백이정은 1284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여러 관직을 지냈다. 1298년에는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 연경으로 가서, 10년 동안 머물면서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그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安珦, 1243~1306)의 제자이며,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많은 제자를 가르쳐 성리학을 널리 보급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봉분 주위에는 평평한 바위로 담장이 둘러져 있고 바닥에는 자연석이 깔려 있다. 주변에 소나무가 우거져 있으며, 산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계단식으로 쌓은 석축이 있다. 봉분을 쌓아 올린 돌이나 주변 담장을 쌓은 수법이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성곽 축조법과 비슷하다.

남해 난음리에는 백이정을 기리는 사당인 난곡사(蘭谷祠)가 있다.

공공언어 감수결과

고려 시대의 유학자 백이정(白頤正, 1247~1323)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곳이다.

백이정은 1284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여러 관직을 지냈다. 1298년에는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 연경으로 가 10년을 머물면서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그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의 제자이며, 이제현, 박충좌 등 많은 제자를 가르쳐 성리학의 체계를 확립하고, 널리 보급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무덤 주위에는 평평한 바위로 담장을 둘렀고 바닥에는 자연석이 깔려 있다. 주변에는 소나무가 우거져 있으며 산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다듬어진 돌을 계단식으로 쌓았다. 봉분을 쌓아 올린 돌이나 주변 담장을 쌓은 방법이 고려 시대의 전형적인 성곽 축조법을 따르고 있다.

남해 난음리에는 백이정을 기리는 사당인 난곡사(蘭谷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