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김해 봉황동 유적
2020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가야시대 대표적인 조개무덤으로 1907년 우리나라 최초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졌던 회현리 패총과 금관가야 최대의 생활 유적지인 봉황대가 합쳐져서 2001년 2월 5일 김해 봉황동 유적으로 확대 지정되었다.
패총에서는 소위 김해식 토기와 각종 철기, 골각기 등과 함께 중국 왕망시대(A.D. 8~23)의 ‘화천’이라는 동전이 출토되어 당시의 교역 상황을 나타내 주고 있으며, 특히 우리나라 최초로 불에 탄 쌀이 출토되어 쌀농사의 기원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었다.
또한 구릉 위에는 황세장군과 여의낭자의 전설과 관련된 여의각, 황세바위 등이 남아있으며 가야시대 고상가옥, 주거지 등이 발굴되었다.
2002년~2005년 해상포구, 고상가옥 수혈주거, 망루, 목책 등을 복원·정비하였으며 1999년 3월 부산대 박물관에서 회현리 패총을 재발굴하여 2006년 단면전시관 형태로 개관하였다.
수정 국문
초고
이 곳은 고대 한반도 남부 지역의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는 유적이 모여 있는 곳이다.
봉황대는 유적이 분포하는 구릉을 중심으로 서쪽의 지형이 봉황이 날개를 편 모습 같다고 여겨 김해부사였던 정현석(1817-1899)이 이름을 붙인 것이라 한다.
1992년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발굴조사를 통해 구릉 서쪽에 자연재해로부터 가옥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도랑과 바닥을 얕게 파고 만든 움집 형태의 집터가 밀집한 것을 확인하였다. 이를 통해 이곳에 삼한시대부터 대규모 취락이 형성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항구에 선박을 댈 수 있도록 설치한 시설과 창고로 추정되는 고상가옥, 항구를 살피기 위한 망루 등의 흔적이 발견되어 과거 이 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다양한 형태의 사냥도구와 조리도구, 토기류, 철기류와 섬유 흔적 등이 출토되었다.
한편 봉황대 구릉 남동쪽의 경사면에서는 패총이라 불리는 조개더미의 단면을 확인할 수 있다. 패총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버린 조개나 굴 등 패류의 껍데기와 생활 쓰레기가 쌓여 만들어진 유적으로, 이를 통해 선사시대의 문화, 자연환경, 사람들의 생활 모습 등을 알 수 있다.
이 곳은 ‘회현리 패총’으로 명명되었으며, 기원 전후 무렵부터 4세기까지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907년 처음 알려져 일제시대에도 여러 차례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이후로도 여러 차례의 추가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다량의 토기 조각과 철기류, 뿔로 만든 도구, 가락바퀴, 불탄 쌀, 동물뼈, 중국 화폐인 화천 등의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발견된 불에 탄 쌀은 고대의 쌀과 농경을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또 왕망이 세운 중국 신(新)나라(A.D. 8~23)의 화폐 ‘화천’은 당시 한반도 남부 지방이 고대 중국의 국가들과 교류했던 사실을 보여준다.
2006년 전시관을 개관하여 패총의 발굴면을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하였다.
패총 주변에서는 고인돌의 뚜껑돌로 추정되는 부재와 여러 형태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그 중 1기의 독무덤에서 청동기 유물이 출토되어 무덤들의 조성 시기는 청동기 시대로 추정한다.
2001년에 회현리 패총과 봉황대 유역을 통합해 사적으로 정한 후, 2002년부터 2005년 사이에 해상포구, 고상가옥, 망루, 목책 등을 복원·정비하였으며, 2006년 패총전시관을 개관하였다.
구릉 위에는 가야의 황세 장군과 여의낭자의 전설과 관련된 여의각, 황세바위 등이 남아있다.
- 가야국의 두 재상인 황재상과 출재상의 자녀인 황세와 출여의는 남자 형제처럼 자랐지만, 여의가 여자인 것을 알고 결혼을 약속했다. 그러나 황세가 가야를 구하는 공을 세우자 임금이 외동딸인 공주과 결혼을 시켰다. 여의는 결혼을 하지 않고 기다리다가 이른 나이에 죽고, 황세도 그 소식을 듣고 병을 얻어 죽었으며, 공주는 이후 출가했다고 한다(간단한 요약.)
1차 수정
봉황동유적은 기원 전후 무렵부터 4세기까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패총, 고인돌, 무덤, 집터 등의 생활유적이 모여 있는 곳이다. 1907년 우리나라 최초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졌던 회현리 패총과 금관가야 최대의 생활 유적지인 봉황대를 포함한다.
패총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버린 조개나 굴 등 패류의 껍데기와 생활 쓰레기가 쌓여 만들어진 유적이다. 회현리 패총에서는 다량의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불에 탄 쌀은 고대의 쌀과 농경을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고, 중국 신(新)나라(A.D. 8~23)의 화폐 ‘화천’은 당시 한반도 남부 지방이 고대 중국의 국가들과 교류했던 사실을 보여준다.
패총 주변에서는 고인돌의 덮개돌로 추정되는 부재와 여러 형태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그 중 1기의 독무덤에서 청동기 유물이 출토되어 무덤들의 조성 시기는 청동기 시대로 추정한다.
1992년에는 구릉 서쪽에 움집 형태의 집터가 밀집한 것을 확인하였다. 또 항구에 선박을 댈 수 있도록 설치한 시설과 창고로 추정되는 고상가옥, 항구를 살피기 위한 망루 등의 흔적이 발견되어 과거 이 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다양한 형태의 사냥도구와 조리도구, 토기류, 철기류와 섬유 흔적 등이 출토되었다.
2001년에 회현리 패총과 봉황대 유역을 통합해 사적으로 정한 후, 2002년부터 2005년 사이에 해상포구, 고상가옥, 망루, 목책 등을 복원·정비하였으며, 2006년 패총전시관을 개관하였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 1
- 최근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한 성과, 특히 금관가야의 토성, 왕궁과 관련된 내용이 누락되었으므로 보완할 필요가 있음
- 분야별 자문위원 2
- 봉황동유적은 기원 전 2세기 무렵부터 기원 후 4세기까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조개무지, 고인돌, 무덤, 집터 등의 유적이 모여 있는 곳이다. 1907년 우리나라 최초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졌던 회현리 조개무지와 금관가야 최대의 생활 유적지인 봉황대를 포함한다.
- 조개무지는 선사·고대 사람들이 버린 조개나 굴 등 조개껍데기와 생활 쓰레기가 쌓여 만들어진 유적이다. 회현리 조개무지에서는 많은 수량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특히 이곳에서 출토된 불에 탄 쌀은 고대의 쌀과 농경을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고, 중국 신(新)나라(CE 8~23)의 화폐 ‘화천(貨泉)’은 당시 한반도 남부 지방이 고대 중국의 국가들과 교류했던 사실을 보여준다.
- 조개무지 주변에서는 고인돌의 덮개돌로 추정되는 돌과 여러 형태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그중 1기의 독무덤은 일본열도의 야요이[弥生]계 독과 청동기 유물이 출토되어 왜인들과 교류하였음을 나타낸다.
- 1992년에는 구릉 서쪽에 움집터가 모여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또 항구에 선박을 댈 수 있도록 설치한 시설과 창고로 추정되는 고상가옥, 항구를 살피기 위한 망루 등의 흔적이 발견되어 과거 이 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다양한 형태의 사냥도구와 조리도구, 토기류, 철기류와 섬유 흔적 등이 출토되었다.
- 2001년에 회현리 조개무지와 봉황대 유적을 통합해 사적 제2호로 지정한 후, 2002년부터 2005년 사이에 포구, 고상가옥, 망루, 목책 등을 복원·정비하였고, 2006년 패총전시관이 개관되었다.
-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패총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버린 조개나 굴 등 껍데기가 쌓여 무덤처럼 이루어진 유적이다. 회현리 패총에서는 다량의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불에 탄 쌀은 고대 쌀과 농경 연구에 중요 자료가 되었고,
- 사적 지정과정과 복원정비과정 등은 안내문에 불필요해 보임 (‘2001년에 회현리 패총과 ~ 2006년 패총전시관을 개관하였다’ - 삭제 무방)
2차 수정
봉황동유적은 기원 전 2세기 무렵부터 기원 후 4세기까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패총, 고인돌, 무덤, 집터 등의 생활유적이 모여 있는 곳이다. 1907년 우리나라 최초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졌던 회현리 패총과 금관가야 최대의 생활 유적지인 봉황대를 포함한다.
패총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버린 조개나 굴 등의 껍데기와 생활 쓰레기가 쌓여 만들어진 유적이다. 회현리 패총에서는 다량의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특히 불에 탄 쌀은 고대의 쌀과 농경을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고, 중국 신(新)나라(A.D. 8~23)의 화폐 ‘화천(貨泉)’은 당시 한반도 남부 지방이 고대 중국의 국가들과 교류했던 사실을 보여준다.
패총 주변에서는 고인돌의 덮개돌로 추정되는 돌과 여러 형태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그 중 1기의 독무덤에서 청동기 유물이 출토되어 무덤들의 조성 시기는 청동기 시대로 추정한다.
1992년에는 구릉 서쪽에 움집터가 모여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또 항구에 선박을 댈 수 있도록 설치한 시설과 창고로 추정되는 고상가옥, 항구를 살피기 위한 망루 등의 흔적이 발견되어 과거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다양한 형태의 사냥도구와 조리도구, 토기류, 철기류와 섬유 흔적 등이 출토되었다.
2001년에 회현리 패총과 봉황대 유역을 통합해 사적으로 정한 후, 2002년부터 2005년 사이에 포구, 고상가옥, 망루, 목책 등을 복원·정비하였으며, 2006년 패총전시관을 개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