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김해 대성동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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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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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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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

1~10 공통문구(고분군 종합 안내..?→ 각 고분 설명 앞에 배치)

대성동 고분군은 국립김해박물관과 김해 수로왕릉 사이 경사가 완만한 구릉에 동서로 뻗어 형성되어 있는 가야의 무덤들이다. 구릉 주변 평지에는 1∼3세기 무덤이, 구릉 정상부에는 4∼5세기 무덤이 밀집되어 있다.

1990년부터 2014년까지 총 9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분묘 212를 포함해 총 219기의 유구가 조사되면서 삼한시대 구야국 단계에서 금관가야 시기까지 가야문명의 모든 묘제가 조성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곳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들은 한·중·일의 문화교류 상황을 밝혀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며, 금관가야 전성기의 문화를 잘 보여준다.


  • 대성동고분군에서 조사된 유구는 분묘 212기, 수혈 2기, 기와 가마 4기, 삼가마 1기, 구상 유구 1기를 포함하면 총 219기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사적지정 구역에 접한 구지로분묘군에서 목관묘 15기, 목곽묘 40기, 옹관묘 4기가, 가야의 숲(현 수릉원)에서 목관묘 3기, 목곽묘 7기, 석곽묘 10기, 석실묘 1기, 옹관묘 5기, 토광묘 1기가, 가야사 조성사업 주차장부지 내에서 목곽묘 5기, 석곽묘 1기를 비롯하여 고읍성터가 조사되었다.
  • 세계문화유산 정식 등재 추진중 ; 우리나라에서 4세기 대 대륙계 유물들이 대거 출토된 곳은 대성동고분군이 유일하다. 또 일본과의 교류를 설명해 주는 파형동기, 통형동기, 벽옥제석제품, 동촉 등 왜계 유물도 꾸준히 출토되고 있다. 이 중 파형동기는 대성동고분군에서만 확인됐다. 통형동기와 벽옥제 석제품이 함께 출토된 경우도 대성동고분군 외에는 없다. 대성동고분군은 금관가야의 지배집단인 대성동 세력이 중국 대륙 및 일본과 활발한 교역을 했음을 입증해 준다.


1)김해 대성동 고분군(91호분)

대성동 91호분은 2012년 대성동고분박물관에서 실시한 7차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유구로, 4세기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서향을 주축으로 하는 초대형 무덤이나, 도굴을 당해 전체적인 양상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피장자를 중앙에 안치하고 사방에 유물을 부장한 것으로 보인다. 토기류와 철기류, 청동류와 골각기 등 다양한 종류의 유물 260여 점과 빗 모양의 장신구를 달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순장자를 포함한 인골 5개체, 당시 장례 의식에 활용한 것으로 보이는 생선과 맷돼지의 뼈를 담고 있는 토기 2기 등이 확인되었다.

여기에서 발굴된 유리 파편은 중국과 요령지역을 경유해 진행된 북방 유목민족과의 실크로드 교류가 금관가야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단서이다. 그 외 고대 중국이나 일본과의 교역 사실을 알려주는 외래 유물도 다수 출토되어 대성동 고분을 축조한 금관가야 지배층의 국제적 지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 목곽 중앙의 동쪽에 인접하여 남쪽으로 머리를 둔 순장자 3인이 위치하고, 서쪽 충전토 상부에서 순장자 2인이 확인되었다.
  • 발굴된 무덤들의 규모를 결정할 때 35㎡ 이상의 무덤은 ‘초대형’으로 분류함.
  • 91호분에서는 중원계 유물과 북방계 유물이 모두 출토되는 등 4세기대 가야・신라권역의 고분들 중에서 가장 많은 대륙계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91호분에서 출토된 로만글라스 파편 등은 중국의 중원지역이나 요령지역과의 직접적 교류와 이들 지역이나 정치체제를 매개로 진행되었던 북방 유목민족과의 교류나 이들을 통한 로마와 중국 간 실크로드 상의 교류가 금관가야지역까지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자료이다.
  • 91호분에서 발굴되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가야시대 조개장식 말갖춤새(마구)가 현 일본 오키나와 근처에서 잡힌 조개류 껍데기로 만든 것이 확인되었다.


2)김해 대성동 고분군(88호분)

대성동 88호분은 2012년 대성동고분박물관에서 실시한 7차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유구이다. 4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인접한 다른 고분들과 도굴로 인해 많이 파괴되었다.

88호분에는 이전 시기에 조성된 봉분들과 달리 바닥 시설이 설치된 것이 확인되었다. 피장자를 중앙에 안치하고 'ㅁ‘자형으로 부장물을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순장자로 추정되는 인골 3개체가 수습되었는데, 각각 어린 여성과 성인 남성, 노인 여성으로 순장 당시의 연령 및 성별이 확인 가능하며 빗 모양 장신구와 관옥 등 여러 부장품을 지닌 상태로 발굴되었다.

조사를 통해 무구류와 거울을 비롯해 토기류, 철기류, 장신구류 등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특히 일본 열도를 포함해 가장 많은 양인 13점의 파형동기가 발견되는 등 고대 일본과의 관련성이 높은 유물들이 다수 확인되었다. 또 중국 북방민족의 무덤과 유사한 다량의 뼈 화살촉과 중국제 진식대금구 등이 출토되어 당시 가야의 대외 교류양상을 잘 알 수 있다.


  • 파형동기 : 소용돌이 모양의 청동기 장식. 대성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파형동기는 서기 3세기 이후 일본에서 제작된 청동기가 금관가야에 유입되어 정치적 실력자의 무덤에 위세품으로 부장된 것으로 여겨진다. 파형동기는 통형동기와 더불어 당시 가야와 왜의 교류 관계를 입증하는 중요한 유물로서 평가된다.
  • 파형동기는 국내에서 대성동고분군에서만 부장된다. 특히 대성동 88호분에 파형동기 13점이 부장되었는데, 일본열도를 포함해서 가장 많은 양에 해당한다.
  • 주변 수형 유구에서 동물 유체 4종(너구리 맷돼지, 소, 말) 26점 출토 (너구리, 맷돼지 추청 유체는 패총에서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있음.


3)김해 대성동 고분군(70호분)

대성동 70호분은 4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2009년 5차 발굴조사 때 확인된 유구로, 2013년 실시한 추가조사에서 주곽이 발견되면서 5차 조사 때 발견한 것은 부곽으로 판명되었다.

도굴로 인한 파괴가 심해 명확한 구조는 복원하기 힘들지만 출토된 유물들의 위치로 볼 때 중앙에 관을 두고 세 방향에 순장자를 안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을 기준으로 오른쪽에는 무기류, 왼쪽에는 농기구류, 위아래로는 토기군이 배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대성동 고분군의 무덤 중 가장 많은 철촉이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 중 3세기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리 파편들은 91호분에서도 발굴된 로만글라스 조각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중국에서 최상층 계급이 사용한 진식대금구와 상어 이빨도 발굴되어 당시 금관가야 지배층의 위세와 대외교류 범위를 짐작하게 해준다.


4)김해 대성동 고분군(93호분)

대성동 93호분은 2016년 실시된 9차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유구이다. 5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근의 94호분 및 지석묘의 일부를 파괴한 형태로, 유물 대부분이 도굴되었다.

중앙에 무덤의 주인을 안치하기 위한 바닥 시설이 설치되어 있으며, 좌우에 순장자의 것으로 추측되는 장식품들이 확인되어 북쪽에서 확인된 1구의 순장자 유골을 포함해 총 5인의 순장자가 안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철제 유물 4점과 항아리 1점이 발견되었지만 이것들은 93호분이 파괴한 다른 무덤 혹은 다흔 시대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 무덤이 1호분의 뒤를 잇는 금관가야 지배층의 것이라는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한반도 남쪽 정벌 이후인 5세기 전후로 가야가 멸망했다는 기존의 학설을 다시 검토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5)김해 대성동 고분군(7호분)

대성동 7호분은 고분전시관 부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던 2003년에 확인된 유구로, 5세기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조성된 가야의 대형 무덤들은 다량의 무기류가 부장되는 특징이 있다. 7호분에서 발견된 갑옷 중 상반신을 보호하는 갑옷의 형태는 부산의 복천동 고분군에서 주로 발견되는 유물과 유사하다. 이를 토대로 대성동 고분군 집단과 복천동 고분군 집단의 교류를 짐작할 수 있다.


6)김해 대성동 고분군(3호분)

2호분의 동쪽에 위치하는 3호분은 1990년에 실시된 2차 조사에서 확인되었다. 4호분과 겹쳐져 조성되었는데 도굴 피해를 당해 정확한 부장 양상 파악은 어려우며, 4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북쪽 벽에 순장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3구의 인골 흔적이 확인되었으며, 이 아래에 순장자의 것으로 보이는 유리구슬이 출토되었고 이외에도 토기류와 철제 유물들이 확인되었다.


7)김해 대성동 고분군(1호분)

대성동 1호분은 1990년에 실시된 1차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유구이다. 5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곳에서 확인되는 목곽묘 유형중 가장 마지막 단계의 초대형 목곽묘이다.

도굴 때문에 부장 유물 대부분이 사라졌고, 남아있는 것도 원형을 잃은 것이 많다.

다량의 유리구슬이 확인된 중앙부에 피장자를 안치한 것으로 보이며, 북쪽과 남쪽에 각 2인, 동쪽에 1인의 순장자를 안치했던 흔적이 확인되었다. 매장 의례 과정에서 동물을 묻는 의식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소의 턱뼈 조각도 발견되었다.

부장물들은 내부의 벽을 따라 배치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서쪽에서는 토기가, 북쪽에서는 마구와 청동기류가, 남쪽에서는 철제 무기류가 주로 발견되었다. 마구는 중국 동북지방 계통의 것이며, 3점의 통형동기는 고대 일본과의 교류를 짐작하게 하는 유물이다.


8)김해 대성동 고분군(2호분)

대성동 2호분은 1990년에 실시된 1차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유구로 구릉의 동쪽 최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4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다른 분묘와의 중복이나 파괴 현상이 없다.

내부가 전면 도굴되어 원형을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철제 무기류와 마구류, 청동기, 마노옥 소재 장신구 등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특히 잔존하는 토기 파편의 형태나 주죽 방향의 차이, 시신을 올리기 위한 자리를 별도로 조성한 점 등을 통해 이전 단계와는 구분되는 매장 의례 방식이 등장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9)김해 대성동 고분군(73호분)

대성동 73호분은 2011년에 실시된 6차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유구로, 5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무덤이지만, 도굴 때문에 유물의 파손과 유실이 심하다.

73호분은 대성동 고분군에서 조사된 돌덧널무덤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무덤으로 세 덩어리의 개석이 확인되었다. 바닥 부분에서 확인된 목조 시설을 설치했던 흔적 역시 높은 벽체를 쌓기 위해 마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출토된 토기 중에는 창녕이나 진주 등 다른 지역의 고분에서 발견되는 것들과 유사한 형태의 것이 발견되며, 이를 통해 해당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했던 다른 가야국들과의 교류를 알 수 있다.


10)김해 대성동 고분군(고인돌)

2014년 9차 발굴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이 지석묘는 청동기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북쪽은 70호분에 의해, 서쪽은 93호분에 의해 일부가 파괴되었다.

무덤광의 규모는 잔존길이 685㎝, 너비 440㎝로 대형에 속하며, 7매의 판석으로 덮여 있었다.

민무늬토기와 석촉이 많이 부장되어 있었고, 이외에도 붉은간토기, 조개껍질, 화살대흔적 등이 확인되었다.

1차 수정

종합안내판

대성동 고분군은 국립김해박물관과 김해 수로왕릉 사이 경사가 완만한 구릉에 동서로 뻗어 형성되어 있는 가야의 무덤들이다. 구릉 주변 평지에는 1∼3세기 무덤이, 구릉 정상부에는 4∼5세기 무덤이 밀집되어 있다.

1990년부터 2014년까지 총 9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총 206기가 조사되었으며, 고인돌, 독무덤, 덧널묘 등 삼한시대 구야국 단계에서 금관가야 시기까지 가야문명의 모든 묘제가 순차적으로 조성된 것이 확인되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들은 한·중·일의 문화교류 상황을 밝혀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며, 금관가야 전성기의 문화를 잘 보여준다.

1)김해 대성동 고분군(91호분)

91호분은 4세기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굴을 당해 전체적인 양상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피장자를 중앙에 안치하고 사방에 유물을 부장한 것으로 보이며, 토기류와 철기류, 청동류와 골각기 등 다양한 종류의 유물 260여 점과 순장자로 추정되는 인골 5개체가 수습되었다. 특히 두개골 쪽에서 빗 모양의 장신구가 출토된 인골이 주목되었으며, 당시 장례 의식에 활용한 것으로 보이는 생선과 맷돼지의 뼈를 담고 있는 토기 2기도 확인되었다.

또 여기에서 발굴된 유리 파편을 통해 실크로드 교류가 금관가야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으며, 그 외 고대 중국이나 일본과의 교역 사실을 알려주는 외래 유물도 다수 출토되었다.

2)김해 대성동 고분군(88호분)

88호분은 4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인접한 다른 고분들과 도굴로 인해 많이 파괴된 상태이다.

이전 시기에 조성된 봉분들과 달리 바닥 시설이 설치된 것이 확인되었다. 피장자를 중앙에 안치하고 'ㅁ‘자형으로 부장물을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순장자로 추정되는 인골 3개체가 수습되었는데, 각각 어린 여성과 성인 남성, 노인 여성으로 순장 당시의 연령 및 성별이 확인 가능하며 빗 모양 장신구와 관옥 등 여러 부장품을 지닌 상태로 발굴되었다.

무구류와 거울을 비롯해 토기류, 철기류, 장신구류 등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특히 소용돌이 모양의 청동기 장식과 같이 고대 일본과의 관련성이 높은 유물과, 중국제 진식대금구 등이 출토되어 당시 가야의 대외 교류양상을 보여준다.

3)김해 대성동 고분군(70호분)

70호분은 4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굴로 인한 파괴가 심해 명확한 구조는 복원하기 힘들지만 출토된 유물들의 위치로 볼 때 중앙에 관을 두고 세 방향에 순장자를 안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을 기준으로 오른쪽에는 무기류, 왼쪽에는 농기구류, 위아래로는 토기군이 배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대성동 고분군의 무덤 중 가장 많은 철촉이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 중 3세기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리 파편들은 91호분에서도 발굴된 로만글라스 조각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중국에서 최상층 계급이 사용한 진식대금구와 상어 이빨도 발굴되어 당시 금관가야 지배층의 위세와 대외교류 범위를 짐작하게 해준다.

4)김해 대성동 고분군(93호분)

93호분은 5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근의 94호분 및 지석묘의 일부를 파괴한 형태로, 유물 대부분이 도굴되었다.

중앙에 무덤의 주인을 안치하기 위한 바닥 시설이 설치되어 있으며, 좌우에 순장자의 것으로 추측되는 장식품들이 확인었다. 북쪽에서 확인된 1구의 순장자 유골을 포함해 총 5인의 순장자가 안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5)김해 대성동 고분군(7호분)

7호분은 5세기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조성된 가야의 대형 무덤들은 다량의 무기류가 부장되는 특징이 있다. 7호분에서 발견된 갑옷 중 상반신을 보호하는 갑옷의 형태는 부산의 복천동 고분군에서 주로 발견되는 유물과 유사하다. 이를 토대로 대성동 고분군 집단과 복천동 고분군 집단의 교류를 짐작할 수 있다.

6)김해 대성동 고분군(3호분)

3호분은 4호분과 겹쳐져 조성되었는데 도굴 피해를 당해 정확한 부장 양상 파악은 어려우며, 4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북쪽 벽에 순장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3구의 인골 흔적이 확인되었으며, 이 아래에 순장자의 것으로 보이는 유리구슬이 출토되었고 이외에도 토기류와 철제 유물들이 확인되었다.

7)김해 대성동 고분군(1호분)

1호분은 5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성동 고분군에서 확인되는 목곽묘 유형 중 가장 마지막 단계의 초대형 목곽묘이다.

도굴 때문에 부장 유물 대부분이 사라졌고, 남아있는 것도 원형을 잃은 것이 많다. 다량의 유리구슬이 확인된 중앙부에 피장자를 안치한 것으로 보이며, 북쪽과 남쪽에 각 2인, 동쪽에 1인의 순장자를 안치했던 흔적이 확인되었다. 소의 턱뼈 조각도 함께 발견되어, 매장 의례 과정에서 동물을 묻는 의식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부장물들은 내부의 벽을 따라 배치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서쪽에서는 토기가, 북쪽에서는 마구와 청동기류가, 남쪽에서는 철제 무기류가 주로 발견되었다. 마구는 중국 동북지방 계통의 것이며, 3점의 통형동기는 고대 일본과의 교류를 짐작하게 하는 유물이다.

8)김해 대성동 고분군(2호분)

2호분은 구릉의 동쪽 최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4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다른 분묘와의 중복이나 파괴 현상이 없다.

내부가 전면 도굴되어 원형을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철제 무기류와 마구류, 청동기, 마노옥 장신구 등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특히 잔존하는 토기 파편의 형태나 주축 방향의 차이, 시신을 올리기 위한 자리를 별도로 조성한 점 등을 통해 이전 단계와는 구분되는 매장 의례 방식이 등장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9)김해 대성동 고분군(73호분)

73호분은 대성동 고분군에서 조사된 돌덧널무덤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무덤이다. 5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도굴 때문에 유물의 파손과 유실이 심하다.

바닥 부분에서 확인된 목조 시설을 설치했던 흔적은 높은 벽체를 쌓기 위해 마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출토된 토기 중에는 창녕이나 진주 등 다른 지역의 고분에서 발견되는 것들과 유사한 형태의 것이 발견되며, 이를 통해 해당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했던 다른 가야국들과의 교류를 알 수 있다.

10)김해 대성동 고분군(고인돌)

이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북쪽은 70호분에 의해, 서쪽은 93호분에 의해 일부가 파괴되었다.

무덤방의 규모는 잔존길이 6.8m, 너비 4.4m로 대형에 속하며, 7매의 판석으로 덮여 있었다. 민무늬토기와 석촉이 많이 부장되어 있었고, 이외에도 붉은간토기, 조개껍질, 화살대흔적 등이 확인되었다.

2차 수정

종합안내판

대성동 고분군은 국립김해박물관과 봉황동 유적 사이의 경사가 완만한 구릉에 조성된 금관가야의 지배층 무덤들이다. 구릉 주변 평지에는 1∼3세기 무덤이, 구릉 정상부에는 4∼5세기 무덤이 밀집되어 있다.

1990년부터 현재까지 10여 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총 200여 기가 조사되었으며, 고인돌, 널무덤, 덧널무덤, 돌덧널무덤, 독무덤 등 삼한시대 구야국 단계에서 금관가야 시기까지 모든 묘제가 순차적으로 만들어졌음이 확인되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들은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중국, 고구려, 백제, 신라, 왜 등과 활발하게 교류한 상황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금관가야 전성기의 문화를 잘 보여준다.

1)김해 대성동 고분군(91호분)

91호분은 4세기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 내부는 도굴을 당해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무덤구덩이가 39.36㎡에 이르는 초대형 덧널무덤이다.

덧널 내의 서쪽에 치우쳐 주검을 안치하고 사방에 껴묻거리를 배치하였다. 껴묻거리로는 토기류와 철기류, 청동류와 골각기 등 다양한 종류의 유물 260여 점이 발견되었다. 순장자는 덧널 내에서 3구, 덧널과 구덩이 사이에서 2구가 확인되었는데, 모두 성년 여성과 남성이었다. 당시 장례 의식에 활용한 것으로 보이는 생선과 맷돼지의 뼈를 담고 있는 토기 2점도 확인되었다.

또한 여기에서 발굴된 유리그릇 파편을 통해 실크로드 교류가 금관가야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으며, 그 외 고대 중국이나 일본과의 교역 사실을 알려주는 외래 유물도 다수 출토되었다.

2)김해 대성동 고분군(88호분)

88호분은 4세기 후반에 조성된 덧널무덤이다. 인접한 다른 고분들과 도굴로 인해 많이 파괴된 상태이다.

앞 시기에 만든 덧널무덤들과 달리 덧널 바닥에 납작한 돌들이 깔려있다. 주검을 가운데에 안치하고, 그 주변에 껴묻거리를 배치하였다.

또한 무덤 안에서는 순장자로 추정되는 어린 여성, 성인 남성, 노인 여성의 인골 3구가 확인되었다. 순장 당시의 연령 및 성별이 확인 가능하며 빗 모양 장신구와 대롱옥 등을 지닌 상태로 발견되었다.

무구류와 거울을 비롯해 토기류, 철기류, 장신구류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바람개비 모양의 청동기 장식과 같이 고대 일본과의 관련성이 높은 유물과, 중국제 서진(西晉) 시기에 유행한 허리띠 장식 등이 출토되어 당시 가야의 대외 교류 모습을 보여준다.

3)김해 대성동 고분군(70호분)

70호분은 4세기 후반에 만든 덧널무덤으로, 주검을 넣는 으뜸덧널과 껴묻거리를 넣는 딸린덧널로 이루어졌다. 으뜸덧널은 바닥에 납작한 돌을 깔고 그 위에 주검을 넣었다.

껴묻거리는 토기, 무기류, 농공구류, 덩이쇠, 말갖춤새, 투구와 갑옷 등이 있다. 특히 유리그릇의 파편이 출토되었고, 중국에서 최상층 사람들이 사용한 금동제 허리띠 장식과 상어 이빨도 출토되어 당시 금관가야 지배층의 대외교류가 매우 활발하였음을 알려준다.

4)김해 대성동 고분군(93호분)

93호분은 5세기 전반에 만든 덧널무덤이다. 도굴을 당해 무덤 내부가 파괴되고 껴묻거리가 훼손되었다. 무덤구덩이의 규모가 25㎡로 대성동에 있는 같은 시기의 고분 중에서는 대형급에 속하며 당시 최고지배자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덧널 안 남쪽에는 주검을 안치하기 위해 바닥에 돌을 깔았고, 북쪽에는 구덩이를 파고 1구의 순장자를 묻었다. 순장자를 묻은 위에 껴묻거리로 토기들을 배치한 다소 특이한 구조이다. 북쪽에서 확인된 순장자 1구를 포함해 총 5구의 순장자가 안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5)김해 대성동 고분군(7호분)

7호분은 5세기 전반에 만든 덧널무덤이다. 주검을 넣는 으뜸덧널과 껴묻거리를 넣는 딸린덧널로 이루어져 있으며, 도굴을 당해 원래의 모습은 확인하기 어렵다.

껴묻거리로는 토기, 무기 등이 발견되었고, 순장자로 추정되는 5구의 인골이 확인되었다. 7호분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는 상반신을 보호하는 형태의 갑옷이 있는데 이는 부산의 복천동 고분군에서 주로 발견되는 유물과 유사하다. 이를 토대로 대성동 고분군 집단과 복천동 고분군 집단의 교류를 짐작할 수 있다.

6)김해 대성동 고분군(3호분)

3호분은 4세기 후반에 만든 덧널무덤이다. 주검을 넣는 으뜸덧널과 껴묻거리를 넣는 딸린덧널로 이루어져 있으며, 도굴을 당해 원래의 모습은 확인하기 어렵다.

으뜸덧널 가운데에는 주검을 안치하기 위해 바닥에 돌을 깔았다. 북쪽에서는 순장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3구의 인골 흔적이 확인되었으며, 이 아래에서 순장자의 것으로 보이는 유리구슬이 출토되었다. 이외에도 토기, 덩이쇠, 투구와 비늘갑옷, 판갑옷 등의 껴묻거리가 출토되었다.

7)김해 대성동 고분군(1호분)

1호분은 5세기 전반에 만든 덧널무덤이다. 대성동 고분군에서 확인된 덧널무덤 중 가장 마지막 단계의 초대형 덧널무덤이다. 덧널이 심하게 도굴되어 껴묻거리가 대부분 사라졌고, 남아 있는 것도 원형을 잃은 것이 많다.

주검은 가운데에 안치하였고, 북쪽과 남쪽에 각 2인, 동쪽에 1인의 순장자를 안치했던 흔적이 확인되었다. 소의 턱뼈 조각도 함께 발견되어, 주검을 묻는 과정에서 동물로 제사를 지내는 의식이 있었음을 나타낸다.

주검 주위에는 껴묻거리를 배치하였는데, 서쪽에서는 토기, 북쪽에서는 마구와 청동기류, 남쪽에서는 철제 무기류가 확인되었다. 특히 금관가야의 중요한 위세품인 원통형 청동기가 8점이나 출토되었다. 원통형 청동기는 금관가야의 고분 외에 일본 긴키(近畿) 지역에서도 출토되고 있으며, 금관가야와 고대 일본 사이의 교류가 매우 활발하였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8)김해 대성동 고분군(2호분)

2호분은 구릉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덧널무덤으로, 4세기 후반 금관가야의 왕묘로 추정된다. 무덤의 규모는 길이 8.5m로 1호분과 더불어 대성동 고분군에서 가장 크며, 금관가야 최전성기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무덤이다.

무덤 내부는 주검을 넣는 으뜸덧널과 껴묻거리를 넣는 딸린덧널로 이루어져 있으며, 으뜸덧널에는 바닥에 납작한 돌을 깔았다. 껴묻거리로는 토기, 철제 무기, 투구와 갑옷, 말갖춤새, 덩이쇠, 돌화살촉, 방패모양 청동기, 멧돼지 이빨로 만든 팔찌, 원통형 청동기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덩이쇠는 남쪽 벽을 따라 10겹으로 쌓았던 것으로 보이며, 도굴로 일부만 남아 있음에도 110매가 확인되었다.

9)김해 대성동 고분군(73호분)

73호분은 5세기 후반에 만든 돌덧널무덤이다. 대성동 고분군에서 조사된 돌덧널무덤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무덤구덩이의 길이가 8m가 넘는다. 도굴로 인해 돌덧널이 많이 파손되고 껴묻거리가 유실되었다.

돌덧널의 벽면을 따라 바닥에서 목조시설의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벽을 쌓기 위해 마련된 목조틀 또는 나무덧널로 추정된다. 덧널 바닥에는 작은 깬 돌을 깔았다.

이곳에서 출토된 토기 중에는 창녕이나 진주 등 다른 지역의 고분에서 출토되는 것들과 유사한 토기들이 포함되어 있어 5세기 후반 이후에도 금관가야가 다른 지역과 활발하게 교류하였음을 보여준다.

10)김해 대성동 고분군(고인돌)

이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주변에 삼국시대의 무덤이 만들어지면서 일부 파괴되었다.

긴 네모꼴의 구덩이를 파서 중앙에 돌널을 만들고, 주검과 껴묻거리를 넣은 후 돌 뚜껑을 덮고 그 위에 돌과 흙을 채워 완성하였다. 무덤방의 규모는 잔존길이 6.8m, 너비 4.4m로 대형에 속하며, 7매의 판석으로 덮여 있었다. 껴묻거리로는 민무늬토기, 붉은간토기, 돌화살촉 등이 출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