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김제군 관아와 향교
2020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김제 옛 관아는 조선시대 지방행정의 치소(治所)로서 도시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에 동헌과 내아가 함께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매우 드문 사례이다. 현재 김제관아는 동헌과 내아, 피금각이 남아있으며 비교적 온전한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어 당대의 지방행정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실례(實例)가 되고 있다.
김제군 수령의 공무집행 공간이었던 동헌의 경우 1667년(현종 8년) 김제군수 민도가 처음 세우고 이를 근민헌(近民軒)이라 칭하였으며, 1699(숙종 25년)에 중수하여 명칭을 사칠헌(事七軒)으로 고쳤다고 전한다. 그러나 1667년 이전에 이미 김제 동헌에 대한 시문(時文)이 전해지고 있어, 건립 시기는 수령의 살림채인 내아(내동헌)와 함께 1500년대 중반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한편, 1633년(인조 11년)에 지어진 피금각은 송강 정철의 아들 정홍명이 김제 군수 재임 시 동헌에서 업무를 마친 후 가야금과 바둑, 서책을 읽으며 휴식하기 위한 공간으로 지어졌다.
김제 관아는 현존하는 동헌, 내아, 피금각 이외에 외삼문과 내삼문, 호적고, 사령청 등이 김제지방도(1872년)에 보이며 외삼문의 경우 중층 문루형식에 상층엔 징벽루(澄碧樓), 하증엔 벽지아문(碧池衙門)이라 편액하였다.
수정 국문
초고
이 곳은 관아와 향교가 약 130m 떨어진 인접한 거리에 위치하여 함께 보존되고 있어 관아와 향교를 중심으로 지방 통치와 교화 기능을 담당하던 우리나라 읍치(邑治)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김제 관아는 도시의 중심이 되는 곳에 동헌과 내아가 함께 보존되어 있는 매우 드문 사례로, 당대의 지방행정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예가 된다. 현재 조선시대에 세워진 동헌과 내아, 피금각 건물이 남아있으며 고지도를 통해 더 많은 건물이 배치되어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동헌은 16세기 중반에 이미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1667년과 1699년에 각각 근민헌과 사칠헌이라는 이름으로 중수가 이루어졌다. 1881년 중건 이후 일제강점기 때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읍사무소로 사용되었다. 수령의 살림집인 김제 내아는 동헌의 바로 뒤편에 위치해 있다. 지금은 ‘ㄷ’자형의 안채만 남아있지만, 본래 여러 부속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동헌 서쪽에 위치한 피금각은 1633년 송강 정철의 아들 정홍명(1582~1650)이 김제 군수로 재임할 때 업무를 마친 후 휴식하기 위해 지었다고 하며, 중앙에 방을 두고 사방에 마루를 둘렀다.
김제 향교는 문루와 동서재, 명륜당, 동서무, 대성전이 일자로 배치되어 있다. 대성전은 1404년에 처음 지어졌으나 정유재란 때 불에 탔고, 1635년에 다시 세운 후 몇 차례 고쳐지었다고 한다. 중앙에 출입문을 내고 양쪽 칸에는 골판 벽을 끼웠다. 명륜당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소실된 것을 1958년에 복원했다고 하며, 문루인 만화루는 일제강점기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지역 유생들의 교육과 유교 성현에 대한 제사 기능을 담당했던 김제향교는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1년 지역 유림들에 의해 복구되었으며, 지금은 봄과 가을에는 석전대제를 거행하며 제사 기능만을 유지하고 있다.
김제는 중요한 정치세력이 배출되지 않았음에도 군(郡)으로써 읍의 격이 비교적 높았는데, 이는 이 지역이 농업이 산업의 근간을 이루던 전근대 사회에서 우리나라 대표 곡창지대인 김제-만경평야의 중심지로써 갖는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관아 건물과 향교 건물들은 그에 따른 위계를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있다.
1차 수정
이곳 교동에는 조선시대 지방 관청인 관아와 교육기관인 향교가 약 130m 떨어진 인접한 거리에 함께 보존되어 있다.
김제는 예로부터 벼농사가 발달한 지역으로, 농업이 천하의 근본이 되던 시기에 풍요를 누리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따라서 군(郡)으로써 격이 비교적 높았으며, 관아 건물과 향교 건물 역시 그에 어울리는 위계를 보여주고 있다.
김제군 관아는 수령의 집무실인 동헌과 살림집인 내아가 함께 남아있는 매우 드문 사례이다. 동헌은 16세기 중반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일제강점기 때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는 읍사무소로 사용되었다. 내아는 동헌의 바로 뒤편에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은 안채만 남아있지만, 본래 여러 부속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동헌 옆에 있는 피금각은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 1633년에 지었다.
김제향교는 지역 유생들의 교육과 유교 성현에 대한 제사 기능을 담당하던 곳이다. 문루, 교육공간인 명륜당,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 그리고 대성전을 비롯한 동·서무 등의 제향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1404년에 처음 지어졌으나 정유재란 때 불에 탔고, 1635년에 다시 세운 후 몇 차례 고쳐 지었다고 한다.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1년에 의해 복원되었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선현 27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해마다 봄과 가을에 이들을 기리는 제사를 지낸다.
자문의견
- 사적, 매장 위원1
- 매우 드문 사례이다. →기존 문안에는 “도시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에 동헌과 내아가 함께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매우 드문 사례이다.”라고 되어 있다. 도시의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이 드문 사례인지, 아니면 동헌과 내아가 함께 보존된 것이 드문 사례인지 보충설명 필요.
-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1년에 의해 복원되었다.
-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대상은 서원이고, 이것은 향교인데, 서원철폐령때 철거되었다는 것은 어느 자료에 근거한 것인가? 그렇다면 그에 대한 보충설명이 필요할 듯?
- 사적, 매장 위원2
- “약 130m 떨어진 인접한 거리에” → “약 130m의 인접 거리에”
- “김제는 예로부터 벼농사가 발달한 지역으로, 농업이 천하의 근본이 되던 시기에 풍요를 누리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따라서 군(郡)으로써 격이 비교적 높았으며, 관아 건물과 향교 건물 역시 그에 어울리는 위계를 보여주고 있다.”라는 내용은 객관적이지 못하고, 관아와 향교를 설명하는 데도 적합하지 않음. 또 ‘으로써’는 ‘으로서’
- “피금각은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 1633년에 지었다.”는 기존 문안을 활용하여 정홍명이 지은 사실을 명시할 필요 있음.
- “1911년에 의해 복원되었다.”는 ‘의해’의 주체가 빠졌음. 보충 필요.
- “봄과 가을에 이들을 기리는 제사를 지낸다.” → “봄과 가을에 제향(祭享)을 거행한다.”
- 적절함
- 정확함
- 적절함.
2차 수정
이곳 교동에는 조선시대 지방 관청인 관아와 교육기관인 향교가 약 130m의 인접한 거리에 함께 보존되어 있다.
김제는 예로부터 벼농사가 발달한 지역으로, 농업이 천하의 근본이 되던 시기에 풍요를 누리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따라서 군(郡)으로서의 품격이 다른 군들에 비해 비교적 높았으며, 관아 건물과 향교 건물 역시 그에 어울리는 위사을 보여주고 있다.
김제군 관아는 수령의 집무실인 동헌과 살림집인 내아가 함께 남아있는 매우 드문 사례이다. 동헌은 16세기 중반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일제강점기 때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는 읍사무소로 사용되었다. 내아는 동헌의 바로 뒤편에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은 안채만 남아있지만, 본래 여러 부속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동헌 옆에 있는 피금각은 정철(1536~1593)의 아들 정홍명(1582~1650)이 김제 군수로 재임하던 1633년에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 지었다.
김제향교는 지역 유생들의 교육과 유교 성현에 대한 제사 기능을 담당하던 곳이다. 문루, 교육공간인 명륜당,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 그리고 대성전을 비롯한 동·서무 등의 제향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1404년에 처음 지어졌으나 정유재란 때 불에 탔고, 1635년에 다시 세운 후 몇 차례 고쳐 지었다고 한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선현 27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해마다 봄과 가을에 이들을 기리는 제사를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