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광암 이벽 선생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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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국문

초고

포천 출신의 실학자이자 초기 천주교도인 이벽(1754-1785)의 묘이다. 선생은 본관이 경주이고 무반 가문 출신으로 일찍부터 서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이후 기호남인계 학자인 이가환(1742~1801), 정약용(1762~1836), 이승훈(1756~1801), 권철신(1736~1801) 등과 깊은 교유 관계를 맺으며 경기도 광주의 천진암과 주어사에서 강학회를 열며 서학을 학문에서 종교로 승화시켰다. 이승훈을 청나라에 보내 우리나라 최초로 세례를 받게 했고 선생은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부모님에 대한 효와 신앙 어느 한쪽도 저버릴 수 없어서 집안에 갇힌 채 효심과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하였다. 1970년대 후반에 선생의 묘는 발견되어 1979년 6월 경기도 광주의 천진암으로 이장하였지만 현재의 묘는 이장 이후 새로 조성된 것으로 봉분과 묘비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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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출신의 실학자이자 초기 천주교도 이벽(李檗, 1754~1785)의 묘이다.

이벽은 무반 가문 출신으로 일찍부터 서학[천주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이승훈(李承薰, 1756~1801) 등과 깊은 교유 관계를 맺고 경기도 광주의 천진암과 주어사에서 강학회를 열어 서학을 학문에서 종교로 승화시켰다. 정조 8년(1784) 이승훈의 부친이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 이승훈도 함께 가서 세례를 받고 올 것을 부탁하고 그 절차를 가르쳤다. 이승훈이 우리나라 최초로 세례를 받고 돌아오자, 다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아 정식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러나 집안의 반대가 심해, 집안에 갇힌 채 부모에 대한 효와 신앙 모두를 지키다가 순교하였다.

이벽의 묘는 1970년대 후반에 발견되어 1979년 6월 우리나라 천주교의 발상지인 천진암으로 이장하였다. 현재의 묘는 그 후 새로 조성된 것으로 봉분과 묘비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