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공주 이유태 유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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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이곳은 초려 이유태(李惟泰, 1607~1684)가 말년에 후학을 가르치고 독서로 여생을 보냈던 곳이다. 이유태는 현종‧숙종 대의 문인으로 특히 현종 때 학덕이 높은 유학자로 크게 활약하였으며, 송준길, 송시열, 윤선거, 유계와 함께 충청오현(忠淸五賢)으로 일컬어졌다. 숙종 1년(1675) 복상 문제로 제2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남인의 배척을 받아 영변에 유배되었다. 유배 이후 중동골에서 거주하면서 용문서재(龍門書齋), 사송서재(四松書齋), 중동정사(中洞精舍) 등을 세워 후학을 가르치고 독서로 여생을 보냈다. 현재는 고택과 선생을 제향한 용문서원(1986년 건립)이 남아있다.
수정 국문
초고
이곳은 초려 이유태(李惟泰, 1607~1684)가 말년에 후학을 가르치고 독서로 여생을 보냈던 곳으로 현재 고택과 이유태를 제향한 용문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용문서원의 유래는 이유태가 저술활동을 하고 제자를 가르쳤던 중동서재(中洞書齋)와 용문서재(龍門書齋)에서 비롯되었다. 중동서재는 이유태가 거주하던 집이었고, 용문서재는 현재 용문서원과 종가가 있는 자리에 있던 것으로 주로 이유태의 문하생들이 거주하면서 공부한 곳이다. 용문서재는 후손인 이재원(李在元, 1773~1841)이 용문서사(龍門書社)라 이름을 고치고 잠시 이유태를 제향하기도 하였으나 관의 허락없이 제사를 지낸 것이 문제가 되어 중단되었는데 이것이 용문서원의 시초라 할 수 있다. 이유태가 말년을 보내고 그 후손들이 대대로 세거해 온 공주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긴 유림과 후손들이 용문서재가 있던 자리에 서원을 세울 것을 합의하였고 마침내 1986년 용문서원이 창건되었다.
이유태는 현종·숙종대의 문인이자 학자로 송준길, 송시열, 윤선거, 유계와 함께 충청오현으로 일컬어졌다. 숙종 1년(1675) 복상 문제로 제2차 예송[甲寅禮訟]*이 일어나자 남인의 배척을 받아 영변에 유배되었다. 유배 이후 중동골에서 거주하면서 용문서재(龍門書齋), 사송서재(四松書齋), 중동서재(中洞書齋) 등을 세워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이후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 갑인예송 : 갑인예송(甲寅禮訟)은 1674년(현종 15) 2월 효종(孝宗)의 왕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국상이 일어나자, 시어머니 자의대비(慈懿大妃, 趙大妃)가 입을 상복을 두고 일어난 예송(禮訟) 사건이다. 일명, ‘제2차 예송’이라고도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초고 수정
이곳은 조선시대의 학자 초려 이유태(李惟泰, 1607~1684)가 말년에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낸 건물들이 있었던 자리이다.
이유태는 송준길(宋浚吉, 1606-1672),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윤선거(尹宣擧, 1610-1669), 유계(兪棨, 1607-1664)와 함께 충청오현(忠淸五賢)으로 일컬어졌으며, 예학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현종 4년(1663) 공주 중동골로 낙향해 문하생들이 머물며 공부할 수 있는 용문서재(龍門書齋), 사송서재(四松書齋)와 거주를 위한 중동서재(中洞書齋) 등을 세우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1675년(숙종 1) 상복을 입는 기간을 두고 벌어진 정치논쟁[갑인예송(甲寅禮訟)]*에 연루되어 평안도 영번에 유배되기도 했지만, 4년 후 유배에서 풀려나 공주로 돌아왔고, 이후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현재 이곳에 자리하는 용문서원과 고택은 지역 유림들과 후손들이 후학 양성에 열중했던 이유태를 기리며 용문서재가 있던 자리에 국가의 지원을 받아 1977년에 새로 세운 것이다. 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9월에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올린다.
- 현종·숙종대의 학자로 조선 중기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김장생(1548-1631)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 용문서재는 후손인 이재원(李在元, 1773~1841)이 용문서사(龍門書社)로 이름을 고치고 이유태를 제향하기도 하였으나, 당시에는 관의 허락 없이 사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제사는 중단되었다.
1차 수정
이유태 유허지는 조선시대의 학자 이유태(李惟泰, 1607~1684)가 말년에 여생을 보낸 곳이다.
이유태는 충청남도 금산 출신으로, 송준길(宋浚吉, 1606~1672),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윤선거(尹宣擧, 1610~1669), 유계(兪棨, 1607~1664)와 함께 충청오현(忠淸五賢)으로 불렸다. 현종 4년(1663) 공주 중동골로 이주한 뒤 서재를 지어 후학을 가르쳤으며, 그 후손들이 대대로 이 마을에 살고 있다.
지역 유림들과 후손들이 이유태를 기리는 용문서원을 1986년에 건립하였고, 1988년에는 유물관을 지어 이유태가 남긴 문서와 유물 등을 전시하고 있다. 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9월에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올린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 1
- 공주 중동골로 -> 지역적 표시를 명확하게 하기위해 “공주의” 로 제안
- 서재 -> 명확한 명칭이 아닌 서재로만 기재할 경우 오인할 우려가 있어 삭제 제안
- 분야별 자문위원 2
- 없음.
-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유허지'라는 단어가 한자어인데다 요즘은 거의 쓰지 않는 단어라서 어렵습니다. 그래서 본문 내용은 최대한 쉽게 풀어주는 게 좋겠습니다.
- 불필요한 조사 삭제 -> 예 ; 조선시대
의학자 -> - 말년에 여생을 -> 말년에 독서로 여생을
- 개념 풀이 필요 ->‘충청오현’도 한 번 풀어주세요. 한자로도 표기를 하지만 어린 학생들의 경우 그 의미 파악이 어려워보입니다.
- 현종 4년(1663) 공주 중동골로 이주한 뒤 서재를 지어 후학을 가르쳤으며, 그 후손들이 대대로 이 마을에 살고 있다. -> 문장에 대한 추가 정보 요청 (기록을 보면 ‘중동골로 이주’가 아니라 유배로 보이므로 정확한 확인 필요 - 선생은 중동골에서 저술활동을 하며 제자를 가르쳤는데 선생이 살던 집은 중동서재, 문하생들이 머물며 거주하던 곳은 용문서재였다.)
2차 수정
이유태 유허지는 조선시대의 학자 이유태(李惟泰, 1607~1684)가 말년에 여생을 보낸 곳이다.
이유태는 충청남도 금산 출신으로, 송준길(宋浚吉, 1606~1672),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윤선거(尹宣擧, 1610~1669), 유계(兪棨, 1607~1664)와 함께 충청오현(忠淸五賢)으로 불렸다. 현종 4년(1663) 공주의 중동골로 이주한 뒤 후학을 가르쳤으며, 그 후손들이 대대로 이 마을에 살고 있다.
지역 유림들과 후손들이 이유태를 기리는 용문서원을 1986년에 건립하였고, 1988년에는 유물관을 지어 이유태가 남긴 문서와 유물 등을 전시하고 있다. 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9월에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