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고성이씨 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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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한중연 안내문안

기존 국문

이 건물은 고성이씨 이증의 묘제를 치르기 위하여 1600년 경에 지어졌으며 당호(堂號)는 수다재(水多齋)이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6칸이며 ‘口’자형 기와집으로 중앙에 대청을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다. 부엌과 광, 뒤주를 만들어 재실로서의 기능을 다하고 있다. 몸채는 길이 5칸, 너비 2칸의 ‘一’자형이며 안방과 대청, 건넌방으로 구성되었다. 6칸 대청은 이 지방에서 보기 드문 큰 규모이다. 안동댐 건설로 1974년 월곡면 미질동에서 예안면 기사리로 옮겼다가 1998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수정 국문

초고

이 건물은 고성이씨 가운데 안동에 처음 들어온 이증(李增, 1419~1480)과 그 부인인 경주이씨의 묘를 지키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건립한 건물이다. 이증은 태종대 좌명공신이자 좌의정을 지낸 이원(李原, 1368~1429)의 아들이다. 문음으로 영산현감을 지냈다. 문벌 가문의 후손이었지만 관직에 물러나 안동에서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이 건물은 1600년경 건립되었다. ‘ㅁ’자형 건물로 대청과 온돌방이 있고 부엌과 광, 뒤주가 함께 있다. 원래는 안동군 월곡면 미질동에 있었다. 1974년 안동댐을 건설하면서 수몰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예안면 기사리로 옮겼다가 2000년 다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대청에 ‘수다재(水多齋)’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수다는 물이 많다는 뜻이다. 현판의 뜻이 안동댐 건설 수몰과 기묘하게 통한다.

1차 수정

이곳은 고성이씨 가운데 안동에 처음 들어온 이증(李增, 1419~1480)과 그 부인인 경주이씨의 묘를 지키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건립한 건물이다.

이증의 아버지 이원(李原, 1368~1429)은 조선 초 태종이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왕위에 오르는 데 협력하여 공신이 되었으며 세종 때 좌의정을 지냈다. 이러한 아버지의 공훈으로 이증은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 벼슬길에 올랐으나, 곧 물러나 고향인 안동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이 건물은 1600년경 건립되었다. ‘ㅁ’자형 건물로 대청과 온돌방이 있고 부엌과 광, 뒤주가 함께 있다. 원래는 월곡면 미질동에 있었으나 안동댐을 건설하면서 1974년에 예안면 기사리로 옮겼다가 2000년 다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재사 왼쪽에는 이증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신도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