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강화 초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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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초지진은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외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1656) 구축한 요새이자, 고종 8년(1871) 4월에 통상을 강요하며 내침한 미국 로저스아세아 함대와 고종 12년(1875) 8월 침공한 일본군함 운양호와 치열한 격전을 벌인 격전지이다. 당시 미국, 일본의 함대는 우수한 근대식 무기를 가진데 비해 우리 군은 사거리도 짧고 정조준도 안 되는 열세한 무기로 외세에 대항해 싸웠던 것이다.

특히 일본군함 운양호의 침공은 고종 13년(1876)에 강압에 의한 강화도수호조약(병자수호조약)을 맺어 인천, 원산, 부산항을 개항하게 되고, 또한 우리나라의 주권을 상실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초지진에는 병마첨절제사 1인, 군관 11인, 군사 320인, 전선 3척이 주둔하였었다.

이곳은 민족 시련의 역사적 현장으로 애국애족 및 호국정신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1973년 성곽을 보수하고 당시의 대포를 전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이곳은 바다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구축한 요새이다.

기록에 의하면 경기도 안산에 있던 수군 기지를 병자호란 이후인 1656년 이 곳으로 옮겨 설치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곳은 1870년대 통상을 요구하며 침략한 열강들과의 격전지였다. 1871년 신미양요 때 전력의 열세로 미군에게 패하여 점령당하면서 대부분의 시설물이 파괴되었고, 1875년 일본 운요호 사건 때에는 상륙을 시도하는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운요호 사건은 1876년 체결한 ‘강화도수호조약(병자수호조약)’의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우리나라는 주권 상실의 시련을 겪게 되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허물어져 초지돈대의 터와 성벽의 기초만 남게 되었던 곳에 1973/1976년 초지돈대를 복원하고 이곳에서 실제로 사용했던 대포를 전시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성벽 위에는 조총 공격에 대비하여 추가로 설치한 여장도 복원하였으며, 돈대 옆 소나무에는 1870년대의 격전 중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포탄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 운요호 사건 등 기울임꼴 내용은 빼도 되지 않을지.....
  • 복원 년도에 관해 기사에서 1976년이라고 언급함. 확인 필요,
  • 초지진에는 초지돈(草芝墩)·장자평돈(長者坪墩)·섬암돈(蟾巖墩)이 소속되어 있었고, 포대에는 9개의 대포가 배치되어 있었다. 백여 명의 군사들이 초지진과 부속 돈대들을 지키고 관리했다.

1차 수정

초지진은 서해안으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구축한 요새이다. 기록에 의하면 경기도 안산에 있던 수군 기지를 병자호란 이후인 1656년 이곳으로 옮겨 설치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강화 지역은 1870년대 통상을 요구하며 침략한 열강들과의 격전지였다. 1871년 신미양요 때 전력의 열세로 미군에게 패하여 점령당하면서 대부분의 시설물이 파괴되었고, 1875년 일본 운요호 사건 때에는 상륙을 시도하는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운요호 사건은 1876년 체결한 ‘강화도수호조약(병자수호조약)’의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우리나라는 주권 상실의 시련을 겪게 되었다.

초지진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허물어져 돈대의 터와 성벽의 기초만 남게 되었다. 이후 1970년대에 돈대를 복원하고 이곳에서 실제로 사용했던 대포를 전시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성벽 위에는 조총 공격에 대비하여 추가로 설치한 여장도 복원하였다. 돈대 옆 소나무에는 1870년대의 격전 중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포탄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1
    • 운요호 사건은 1876년 체결한 ‘강화도수호조약(병자수호조약)’의 계기가 되었으며, →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1876년에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으며,
      • 강화도조약의 정식명칭은 ‘조일수호조규’이고, 이칭이 강화도조약 또는 병자수호조약임
  2. 분야별 자문위원2
    • 초지진은 조선후기 서해안으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만든 요새이다. 병자호란 이후 수비체제가 강화도 중심으로 개편되면서 경기 서남부 해안의 진들이 강화도와 그 근처로 옮겨 왔다. 초지진도 경기도 안산에 있던 수군 기지를 1656년(효종 7) 이곳으로 옮겨 설치한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 강화 지역은 1870년대 통상을 요구하며 침략한 열강들과 격렬히 싸웠던 곳이다.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때 전력의 열세로 미군에게 패하여 점령당하면서 대부분의 시설물이 파괴되었고, 1875(고종 12)년 일본 운요호 사건 때에는 상륙을 시도하는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운요호 사건은 1876년(고종13) 체결한 ‘강화도수호조약(병자수호조약)’의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우리나라는 주권 상실의 시련을 겪게 되었다.
    • 초지진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허물어져 돈대의 터와 성벽의 기초만 남게 되었다. 이후 1970년대에 돈대를 복원하고 이곳에서 실제로 사용했던 대포를 전시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돈대 옆 소나무에는 1870년대의 전투 중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포탄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3.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수정 의견 없음.

2차 수정

초지진은 조선 후기 서해안으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만든 요새이다. 병자호란 이후 수비체제가 강화도 중심으로 개편되면서 경기 서남부 해안의 진들이 강화도 일대로 옮겨 왔다. 초지진도 경기도 안산에 있던 수군 기지를 1656년 이곳으로 옮겨 설치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강화 지역은 1870년대 통상을 요구하며 침략한 열강들과 격렬히 싸웠던 곳이다. 1871년 신미양요 때 전력의 열세로 미군에게 패하여 점령당하면서 대부분의 시설물이 파괴되었고, 1875년 일본 운요호 사건 때에는 상륙을 시도하는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1876년에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가 체결되었으며, 이후 우리나라는 주권 상실의 시련을 겪게 되었다.

초지진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허물어져 돈대의 터와 성벽의 기초만 남게 되었다. 이후 1970년대에 돈대를 복원하고 이곳에서 실제로 사용했던 대포를 전시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돈대 옆 소나무에는 1870년대의 전투 중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포탄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