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헌공 윤전 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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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헌공 윤전 재실
Ritual House of Yun Jeon
충헌공 윤전 재실,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충헌공 윤전 재실
영문명칭 Ritual House of Yun Jeon
한자 忠憲公 尹烇 齋室
주소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명재로 428-52 (병사리)
지정(등록) 종목 문화재자료 제350호
지정(등록)일 1996년 11월 30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2동/202㎡
웹사이트 충헌공 윤전 재실,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충헌공 윤전 재실은 조선 초기 문인인 충헌공 윤전(1575-1637)의 묘를 관리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지은 건물이다. 윤전의 호는 후촌(後村),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자 윤창세(尹昌世)의 아들로 충헌공파의 시조이다.

1610년(광해군 2)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나 당쟁으로 의해 파직과 복직을 거듭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에는 공주로 피난하는 인조를 모셨고,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김장생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빈궁(嬪宮)을 모시고 강화에 들어갔다가 성이 함락되자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송시영·이시직 등과 함께 자결하려고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적에게 죽임을 당했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윤전 재실은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19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물의 형태는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의 문간채가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안채에는 대청을 중심으로 문간방과 물건을 넣어두는 고방(庫房) 등이 있다. 간결한 삼량집**으로 지붕은 홑처마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 임금이나 이름난 유학자가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기리어 주는 이름
  • 서까래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에 가로지르는 나무가 하나만 있는 건축물

영문

Ritual House of Yun Jeon

This ritual house was built by the descendants of Yun Jeon (1575-1637) for the maintenance of his tomb and the preparation of ancestral rituals.

Yun Jeon is the founder of the Chungheongong Branch of the Papyeong Yun Clan. In 1610, he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and started his service as a civil official, but due to political strife he was dismissed from his post and reinstated several times. During a rebellion against King Injo (r. 1623-1649) in 1624, he escorted the king to refuge outside the capital. During the Manchu invasion in 1637, he escorted the crown princess to refuge in the fortress on Ganghwado Island. When the fortress fell, he attempted to honorably take his own life but did not succeed as he was killed by the enemy.

The ritual house is known to have been built in the 19th century. It consists of a main quarters and a gate quarters that form a square layout with a courtyard in the middle.

영문 해설 내용

조선시대의 문신인 윤전(1575-1637)의 묘소를 관리하고 제사를 준비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지은 재실이다.

윤전은 파평윤씨 충헌공파의 시조이다. 1610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나, 정쟁으로 인해 파직과 복직을 거듭하였다. 1624년 반란이 일어났을 때 도성 밖으로 피난하는 인조(재위 1623-1649)를 호종하였다. 1637년 병자호란 때에는 세자빈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을 떠났고, 강화도의 성이 함락된 후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죽임을 당했다.

재실은 19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채와 문간채가 안마당을 중심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