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임충민공 충렬사
충주 임충민공 충렬사 Chungnyeolsa Shrine for Im Gyeong-eop, Chungj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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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충주 임충민공 충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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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Chungnyeolsa Shrine for Im Gyeong-eop, Chungju |
한자 | 忠州 林忠愍公 忠烈祠 |
주소 | 충청북도 충주시 충열1길 6 (단월동) |
지정(등록) 종목 | 사적 제189호 |
지정(등록)일 | 1969년 11월 21일 |
분류 |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28,862㎡ |
웹사이트 | 충주 임충민공 충렬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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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충렬사는 임경업 장군(1594∼1646)의 초상을 모신 사당이다. 1970년대 후반 장군의 유적을 성역화하여 사당과 외삼문, 내삼문, 강당, 유물전시관 등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대표 유물로는 임경업 초상(문화재자료 제69호), 충렬사비(유형문화재 제272호), 추련도(유형문화재 제300호)가 있다.
충주에서 태어난 장군은 어려서부터 용맹하여 전쟁놀이를 할 때 늘 대장을 맡았으며 기상이 남달랐다고 한다. 1618년(광해군 10)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을 진압할 때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올랐다. 그후 낙안군수 등 여러 관직을 거쳐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청북방어사 겸 영변부사로서 의주의 백마산성을 굳게 지켜 청나라 군대는 백마산성을 피해 남하하기도 했다.
임경업 장군이 활동하던 시기는 명나라가 쇠퇴하고 청나라가 대륙의 패권을 잡아가는 시기였다. 장군은 여러 차례 명나라의 편에서 전투를 치르다가 결국 이 사실이 드러나 1645년 청나라 수도 북경으로 잡혀가게 되었다. 1646년(인조 24) 심기원의 옥사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으로 국내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던 중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장군 사후 약 50여 년이 지난 1697년(숙종 23)에 관작*을 회복하고 사당을 세웠다. 1706년(숙종 32)에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1727년(영조 3)에는 사액(賜額)을 내렸다. 1791년(정조 15)에는 어제달천충렬사비(유형문화재 제272호)를 세웠다. 충렬사는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을 철폐하면서 남긴 47서원 중 하나이다.
*관작(官爵) : 예전에, 관직과 작위를 이르던 말.
영문
Chungnyeolsa Shrine for Im Gyeong-eop, Chungju
This shrine honors Im Gyeong-eop (1594-1646), an admiral from the Joseon period (1392-1910), and enshrines his portrait (Chungcheongbuk-do Cultural Heritage Material No. 69).
Im Gyeong-eop was born in Chungju. It is said that when he was a child playing soldiers, he always served as a leader with an extraordinary spirit, showing his valor from a young age. He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618 and served various official posts. In 1624, he quelled a revolt against the royal court, for which he became a meritorious subject. In 1636, he became the magistrate of Uiju. When the Manchu Qing dynasty invaded in early 1637, he firmly defended Baengmasanseong Fortress in Uiju. The Qing troops gave up the fight at Baengmasanseong Fortress and immediately advanced towards the capital where the king resided. The capital fell within two weeks of the invasion.
This invasion took place at the time when the Chinese Ming dynasty, to whom Joseon Korea had been loyal, was in decline, and the Manchu Qing dynasty began to consolidate power in the region. As a Korean, Im Gyeong-eop had battled on behalf of Ming China, so in 1642, the Manchus pressured the Joseon royal court to capture Im Gyeong-eop and send him to Qing China. During the journey in 1643, Im Gyeong-eop escaped and defected to Ming China. However, Ming China fell the following year, and in 1646, Im Gyeong-eop was captured and transported back to Joseon. He died in jail within just two weeks due to injuries from torture.
In 1697, King Sukjong (r. 1674-1720) posthumously reinstated Im Gyeong-eop’s official post and established this shrine. In 1706, King Sukjong bestowed upon Im Gyeong-eop the title of Lord of Expeditious Loyalty, and in 1722, King Yeongjo (r. 1724-1776) bestowed upon the shrine its name which means “Shrine of Expeditious Loyalty.” In 1871, there was a nationwide decree to shut down shrines and Confucian academies, but Chungnyeolsa Shrine was spared demolition in recognition of Im Gyeong-eop’s honorable deeds.
The current building was constructed in 1978. Also within the shrine complex is a lecture hall, a artifacts exhibition hall, and two commemorative pavilions enshrining steles that honor Im Gyeong-eop and his wife Lady Yi. The stele of Im Gyeong-eop (Chungcheongbuk-do Tangible Cultural Heritage No. 272) on the left was erected in 1791 upon the order of King Jeongjo (r. 1776-1800).
영문 해설 내용
조선시대의 명장 임경업(1594-1646)의 초상(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69호)을 모신 사당이다.
충주에서 태어난 장군은 어려서부터 용맹하여 전쟁놀이를 할 때 늘 대장을 맡았으며 기상이 남달랐다고 한다. 1618년 무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고, 1624년 반란을 진압할 때 공을 세워 공신이 되었다. 1636년에는 의주 부윤이 되었는데, 그 이듬해 청나라 군대가 조선을 쳐들어왔을 때 의주의 백마산성을 굳게 지켰다. 청나라 군대는 백마산성을 포기하고 왕이 있는 수도로 곧바로 진격하는 전략을 택했고, 침략한 지 보름만에 도성을 함락시켰다.
당시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쇠퇴하고 청나라가 대륙의 패권을 잡아가는 시기였으며, 임경업은 여러 차례 명나라의 편에서 전투를 치렀다. 1642년 조선 조정은 청나라의 압력을 받아 임경업을 체포하여 청나라로 압송했으며, 압송 도중 탈출한 임경업은 1643년 명나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1644년 명나라가 결국 멸망하였고, 임경업은 체포되어 1646년 조선으로 압송되었으며, 압송된 지 불과 보름 여 만에 모진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1697년 숙종(재위 1674-1720)이 임경업의 관작을 회복시켜주면서 이 사당을 세웠다. 숙종은 1706년 임경업에게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1727년에는 영조(재위 1724-1776)가 사당에 사액을 내렸다. 1871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전국의 사당과 서원을 대부분 철거하라는 명이 내려졌는데, 충렬사는 임경업의 충절을 인정받아 철거되지 않았다.
현재의 건물은 1978년 새로 지은 것이다. 경내에는 사당 외에도 강당, 유물전시관, 임경업과 부인 이씨를 추모하는 비석을 모신 비각 2동 등이 있다. 두 비석 중 왼쪽에 있는 임경업의 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72호)는 1791년 정조의 명으로 세웠다.
참고자료
- 임충민공 충렬사_임경업 장군을 모신 사당, 쏠쏠한 일상,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jcjkks/221037301722 -> 사당 정면에 걸린 '忠烈祠' 현판의 글씨는 박정희(1917~1979) 전 대통령이 직접 쓴 것입니다.
- 누명으로 죽은 충민공 임경업장군의 유적을 찾아서, 우리문화신문, 2019.12.17 https://www.koya-culture.com/news/article.html?no=122037 -> 경내 사진(건물 및 비석) 상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