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청주한씨 시조제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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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청주한씨 시조제단비
Altar Stele for the Founder of the Cheongju Han Clan
청주 청주한씨 시조제단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청주 청주한씨 시조제단비
영문명칭 Altar Stele for the Founder of the Cheongju Han Clan
한자 淸州 淸州韓氏 始祖祭壇碑
주소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운동로129번길 4-18 (운동동)
지정(등록) 종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9호
지정(등록)일 1990년 12월 14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청주 청주한씨 시조제단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2015

이 비는 청주를 본관으로 하는 대표적인 씨족 중의 하나인 청주한씨의 시조인 한란(韓蘭, 853~916)을 제사하기 위하여 제단을 마련하고, 이와 함께 세운 사적비이다. 한란은 청주지역의 호족으로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하러 청주를 지날 때 군량미를 도와 고려의 개국 공신이 된 인물이다. 1605년(선조38)에 청주목사 겸 청주진병마절제사(淸州鎭兵馬節制使)로 부임한 한백겸(韓百謙)이 시조의 유적을 고증하여 찾고, 그의 동생인 이조참판 한준겸(韓浚謙)이 시조의 내력을 상세히 서술한 비문을 지었다. 비문에 의하면, 당시 위토(位土:문중의 제사 등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토지)를 마련하고 제단을 쌓아 담을 둘러 경계를 표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비석만 남았고, 비문도 거친 화강암에 새긴 관계로 풍화가 심한 상태여서 판독이 거의 불가능하다.

2021

이 제단비는 청주 한씨 시조인 한란(韓蘭, 853~916)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으로, 청주 한씨 유기 서사비(淸州 韓氏 遺基 敍事碑)라고도 한다.

청주의 호족이었던 한란은 매년 수만 석을 추수하던 부농이었다. 어느 날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하기 위하여 청주를 지날 때 왕건의 십만 대군을 위한 군량미를 제공하는 공을 세워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었다.

이 비석은 선조 38년(1605) 청주목사(淸州牧使)였던 한백겸(韓百謙)이 자신의 시조인 한란의 유적을 고증하여 찾은 후, 그곳에 제단을 쌓고 세운 것이다. 비문의 내용은 그의 동생인 한준겸(韓浚謙)이 쓴 것으로, 시조의 내력을 상세히 설명하여 모든 후손들이 제사 때마다 읽고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비석은 17세기 역사지리학의 대가인 한백겸이 자신의 시조와 관련된 옛터를 고증하여 세운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한 것은 고려 건국 이후인데, 한란이 916년 세상을 떠났다면 고려 건국보다 앞서므로 맞지 않음.

영문

  • Altar Stele for the Founder of the Cheongju Han Clan, Cheongju

2015

This stele is for the commemoration of the altar for Han Ran, founder of the Cheongju Han Clan. During the waning years of Unified Silla (668–935), Han supported Wang Geon, the founder of the Goryeo Dynasty (918-1392), and provided Wang and his troops with food and shelter when they camped at the village. Wang defeated rival rebels and accepted the surrender of Silla and, thereafter, proclaimed the new kingdom of Goryeo. Han was awarded the title of meritorious subject of Goryeo for his actions. Han Baek-gyeom, a descendant of Han Ran, uncovered the former site of Han’s altar in 1605 and erected this stele in commemoration of the site. The stele has since become illegible due to erosion.

2021

This stele was erected in 1605 to commemorate Han Ran, founder of the Cheongju Han Clan.

Han Ran was a local gentry of the Cheongju area who lived during the Later Three Kingdoms period (892-936). In 928, he provided food provisions to King Taejo (r. 918-943), the founder of the Goryeo dynasty (918-1392), when the king passed by Cheongju to subdue the Later Baekje kingdom (892-936). Han Ran was later made a meritorious subject of Goryeo for this distinguished contribution.

When Han Baek-gyeom (1550-1613), a descendant of Han Ran and a historian-geographer, was serving as magistrate of Cheongju, he found this historical site relating to his ancestor through historical research. To commemorate the site, he built an altar and erected this stele.

The stele consists of a rectangular pedestal, a body stone, and a capstone. The inscription was composed by Han Baek-gyeom’s younger brother Han Jun-gyeom (1557-1627). It was intended to be read by the clan’s descendants whenever there was an ancestral ritual so that they may know the detailed history of the clan’s founder. Due to severe erosion, it is mostly illegible.

영문 해설 내용

2021

이 비석은 청주한씨 시조인 한란을 기리기 위해 1605년에 세운 것이다.

한란은 후삼국시대 청주 지역의 호족이었다. 고려 태조(재위 918-943)가 928년 후백제 정벌을 위해 청주를 지날 때 군량미를 지원하는 등, 태조를 돕는 공을 세워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었다.

한란의 후손이자 역사지리학자였던 한백겸(1550-1613)이 청주 지역의 관리로 파견되었을 때, 고증을 통해 선조의 유적을 찾은 후 그 자리에 제단을 쌓고 이 비석을 세웠다.

비석은 사각형의 받침돌,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비문은 한백겸의 동생 한준겸(1557-1627)이 지었으며, 시조의 내력을 상세히 서술하여 후손들이 제사 때마다 읽고 알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마모가 심해 판독이 어렵다.

참고자료

  • 한란, 디지털청주문화대전 http://cheongju.grandculture.net/cheongju/toc/GC00201591 928년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후백제의 견훤(甄萱)을 정벌하기 위하여 청주를 지날 때 한란은 왕건을 군례(軍禮)로 맞이하고 창고의 곡식을 풀어 하루 동안 왕건의 10만 군대를 배불리 먹였으며, 왕건과 함께 종군(從軍)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한란은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이 되었으며, 벼슬은 삼중대광 태위(三重大匡 太尉)에 올랐다.
  • 청주한씨시조제단비, 디지털청주문화대전 http://cheongju.grandculture.net/cheongju/toc/GC00201200 -> 사각형의 밭침돌 위에 높이 147㎝, 폭 80㎝, 두께 19㎝의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었다. 밭침돌은 흙 속에 묻힌 상태이며 비신은 서쪽으로 약간 기울었다. 비문에 따르면, 당시에 위토(位土)를 마련하는 한편 제단을 쌓고 담을 둘러 경계를 표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