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성사
청성사 Cheongseongsa Shri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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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청성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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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Cheongseongsa Shrine |
한자 | 淸城祠 |
주소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청성사길 99 (가채리) |
지정(등록) 종목 | 시도유형문화재 제64호 |
지정(등록)일 | 1975년 9월 5일 |
분류 | 유적건조물/교육문화/교육기관/서원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1동 |
웹사이트 | 청성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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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청성사는 통일신라 말기의 학자이자 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 857~?)의 위패를 봉안 한 사당이다. 그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다. 1768년(영조 44) 후손 최성묵(崔成黙)의 발의로 영당이 설립되었고, 1935년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청성사로 개칭하였다. 최치원은 12세 때인 869년(신라 경문왕 9) 당나라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 선주 표수현에서 고을의 교육을 담당하던 관리인 현위(縣尉)를 거쳐 관리들의 감찰을 담당하는 시어사(侍御史) 등을 역임하였다.
879년에 황소의 난(黃巢亂)이 일어나자 이를 토벌하기 위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붓으로 적을 물리칠 정도의 뛰어난 문장가였다. 그는 통일신라 헌강왕 11년(885)에 귀국하여 당과의 외교문서를 작성하고 정리하는 직책을 맡았다. 894년(진성여왕 8)에 나라를 개혁하기 위한 『시무10조(時務十條)』를 올려 아찬(阿飡) 의 관직에 올랐으나 중앙귀족의 반발로 실현되지 못하자, 관직을 버리고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은둔하며 여생을 마쳤다. 최치원은 주옥같은 문장을 많이 남겨 동방 문장의 창시자라 불렸으며, 유교의 성인들을 모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청성사는 정면3칸 측면1칸 반의 평면규모로 지붕이 맞닿아 있는 맞배지붕 형태이다.
국문 수정
청성사는 통일신라시대 학자인 최치원(崔致遠, 857~?)을 모신 사당이다.
최치원은 868년 12세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으며, 874년 당나라에서 치른 과거에서 18세로 장원 급제하였다. 이후 당의 관직을 지내던 중, 879년 민란을 일으킨 황소(黃巢)에게 보낸 격문으로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 신라로 돌아와 어지러운 정치를 바로잡고자 힘썼으나 실현되지 않았고, 이에 좌절하여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주옥같은 문장을 많이 남겨 동방 문장의 창시자라 불렸으며, 유교의 성현들을 모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청성사는 원래 1768년 최치원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그의 호를 따 고운영당으로 건립되었다. 당시 영당이 세워진 곳은 영중면이었으나, 1935년 현 위치로 옮기면서 청성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봉안된 영정은 1740년에 그린 것으로 해인사에 있던 최치원 영정을 모사한 것이다.
영문
Cheongseongsa Shrine
This is a shrine dedicated to Choe Chi-won (857-?, pen name: Goun), a scholar of the Unified Silla period (668-935).
In 868, at the age of 12, Choe went to study in Tang China. In 874, he placed first in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for foreigners there and took an official post. In 879, when Huang Chao started a rebellion in China, Choe Chi-won wrote him a well-known manifesto, which made him widely famous as a skillful writer. Later in 885, he came back to Silla and tried to fix the chaotic political situation in the country but did not succeed. Disappointed, he retired from his official post and lived the rest of his life in seclusion at Haeinsa Temple. After he died, he left a multitude of outstanding written pieces and was called the founder of the Korean writing style. He was also later enshrined at the state Confucian shrine (called munmyo in Korean) together with other renowned Confucian scholars.
This shrine was built in 1768 under the name Gounyeongdang to enshrine Choe Chi-won’s portrait. Originally, the shrine was located around 9 km away in today’s Geumju-ri, Yeongjung-myeon. In 1935, it was moved to the current location and renamed Cheongseongsa. The portrait of Choe Chi-won was copied in 1740 from the original from Haeinsa Temple.
참고
- “최치원 영정 보기”, 경주최씨 중앙종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