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명중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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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명중고택
Myeongjung House, Cheongdo
청도 명중고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청도 명중고택
영문명칭 Myeongjung House, Cheongdo
한자 淸道 明重故宅
주소 경상북도 청도군 선암로 480 (신지리)
지정(등록) 종목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73호
지정(등록)일 2013년 4월 8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수량/면적 일곽
웹사이트 청도 명중고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청도 명중고택은 운강 박시묵(雲岡 朴時黙)의 손자 박래현(朴來鉉)이 고종 18년(1881)에 세운 가옥이다. 그 뒤 박래현의 둘째 아들인 박순희(朴淳熺)가 살림집으로 사용하였고, 그의 호를 따서 ‘명중고택’이라 하였다.

이 가옥은 안채, 방앗간채, 곡간채, 중사랑채, 바깥사랑채, 대문간채 등 여섯 채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각 건물들은 트인 ㄹ자 모양으로 평면에 배치되어 있는 양반 주택이다. 한국 전쟁 때에 대문채가 소실되었고, 1990년에는 도로를 확장하면서 큰사랑채가 철거되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 마당이 보이고, 지금은 없어진 큰사랑채의 자리가 나온다. 중사랑채를 지나면 안채가 보이며, 안채 마당의 양쪽으로 방앗간채와 곡간채가 있다. 안채의 대청 마루칸 전체에 문을 달아 두어 부녀자들의 모습이 바깥에 보이지 않게 하려는 당시의 폐쇄적인 양반집 생활 양식을 엿볼 수 있다.

영문

Myeongjung House, Cheongdo

Myeongjung House was established in 1881 by Bak Rae-hyeon (1861-1896). The house’s name comes from the pen name of Bak Rae-hyeon’s second son Bak Sun-hui (1896-1934), whose family resided here.

The house consists of a junior men’s quarters in the front, a women’s quarters in the rear, and a mill and granary to either side. Together, these buildings form a square layout with a central courtyard. The house originally also had a gate quarters and a senior men’s quarters, which were destroyed during the Korean War (1950-1953) and demolished in 1990 due to road construction, respectively. The empty yard in front of the house is where the senior men’s quarters once stood.

The women’s quarters consists of a wooden-floored hall in the center with underfloor-heated rooms to either side and a kitchen on the far right. Doors were installed along the front of the wooden-floored hall to prevent the women of the house from being seen by outsiders. This feature provides a glimpse into the sequestered lifestyle of an aristrocratic family in the late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영문 해설 내용

명중고택은 박래현(1861-1896)이 1881년에 지었다. 이후 박래현의 둘째 아들인 박순희(1896-1934)가 살게 되면서, 그의 호를 따서 이름이 붙여졌다.

이 가옥은 앞쪽의 작은사랑채, 뒤쪽의 안채, 옆쪽의 방앗간채와 곡간채로 이루어져 있으며, 안마당을 중심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원래 이 집에는 대문채와 큰사랑채도 있었으나, 대문채는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고 큰사랑채는 1990년 도로를 확장하면서 철거되었다. 마당 한켠에는 큰사랑채의 자리가 남아 있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이 있고 오른쪽 끝에는 부엌이 있다. 대청 앞쪽에 문을 달아 두어 부녀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하였으며, 이를 통해 조선 후기 폐쇄적인 양반집 생활 양식을 엿볼 수 있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