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동학농민혁명과 세성산 전투
천안 동학농민혁명과 세성산 전투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Cheonan and the Battle of Seseongsan Mounta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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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안내판: 천안 세성산성 |
해설문
국문
천안은 1880년대 초 동학이 전해진 곳으로 1883년 김은경 접주*의 집에서 『동경대전(목천판)』을 펴내는 등 동학농민혁명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특히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에 있는 세성산은 서울로 가는 길목으로 김복용과 이희인 등 많은 동학농민군이 진을 치고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했던 곳이다. 1885년의 ‘세성산 전투’는 동학농민군 주력 부대가 북쪽을 향하여 올라가면서 벌인 전투로 관군과 대규모 전투를 치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세성산 전투에 참여한 동학농민군은 1200여 명으로 추정된다. 세성산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은 세성산 꼭대기를 중심으로 군막을 짓고 흙으로 성을 쌓았다. 그리고 무기를 만들어 군사 훈련을 하는 등 철저하게 전투 준비를 하였다. 마침내 10월 21일 이두황이 이끄는 관군에 맞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으나 무기의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370여 명이 죽고 400여 명이 다치는 등 참혹하게 패배하였다. 세성산 전투의 패배로 동학농민혁명군은 서울 진격로를 확보하지 못하였고, 전력이 약화되었다.
1999년부터 세성산 전투에서 희생된 동학농민군의 넋을 기리기 위해 위령제를 지내기 시작하였고, 2012년에는 희생자 위령비를 세우는 등 천안 지역 동학농민혁명을 추모하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다.
- 접주: 동학의 교구 또는 집회소를 뜻하는 접(接)의 우두머리.
영문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Cheonan and the Battle of Seseongsan Mountain
Donghak, meaning “Eastern Learning,” is a teaching established in 1860 by Choe Je-u (1824-1864). It arose in opposition to the growing presence of Western powers and Christianity in the 19th century. Donghak promoted the belief that “man is heaven and all men are equal.”
In 1894, the magistrate of Gobu (today’s Jeongeup) excessively exploited farmers, so the Donghak followers and peasant army of the Gobu area, with Jeon Bong-jun (1855-1895) at the center, revolted and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started. After this, the revolution continued for about one year. Not merely a local rebellion, the revolution spread nationwide as a large-scale resistance movement founded on the principles of anti-feudalism and anti-foreign influence. The majority of the Donghak leadership were arrested and the revolution ultimately failed, but the basic philosophy of the revolution greatly influenced the subsequent anti-Japanese movement at the turn of the 20th century and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of 1919.
The Donghak Movement spread to the Cheonan area in the early 1880s. At the time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the main unit of the peasant army was heading north to Seoul when a large battle against the government troops broke out on Seseongsan Mountain, which was located along the way. It is presumed that around 1,200 members of the peasant army participated in this battle. The peasant army built military tents at the top of the mountain and constructed an earthen fortress wall, but its weapons were outnumbered and it was brutally defeated, with around 370 dead and 400 injured. Due to the defeat at the Battle of Seseongsan Mountain, the peasant army could not secure the road to advance to Seoul, and its strength declined.
Since 1999, a memorial ritual has been held in honor of the members of the peasant army who died in the Battle of Seseongsan Mountain. Various projects, such as the construction of a memorial monument in 2012, continue to be held to commemorate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the Cheonan area.
영문 해설 내용
동학은 1860년 최제우(1824-1864)가 창시한 종교이다. 19세기 한반도에 등장하기 시작한 서구 세력과 개신교에 대립하는 의미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사람이 곧 하늘이며,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1894년 고부(지금의 정읍 지역)의 군수가 농민들을 과도하게 수탈하자, 전봉준(1855-1895)을 중심으로 한 동학교도와 농민군이 봉기하며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되었다. 이후 1년 여간 계속된 혁명은 지역적 민란의 성격을 뛰어 넘어, 반봉건·반침략을 지향하는 전국적인 대규모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동학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면서 혁명은 결국 실패하였으나 혁명의 기본 정신은 이후의 항일 의병 운동과 3·1 독립 만세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천안에는 1880년대 초 동학이 전해졌다.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농민군 주력부대가 서울을 향해 북진하던 중 길목에 있던 세성산에서 관군에 맞서 대규모 전투를 치뤘다. 세성산 전투에 참여한 농민군은 1200여 명으로 추정된다. 농민군은 산꼭대기를 중심으로 군막을 짓고 흙으로 성을 쌓았으나, 무기의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370여 명이 죽고 400여 명이 다치는 등 참혹하게 패배하였다. 세성산 전투의 패배로 농민군은 서울로 향하는 진격로를 확보하지 못하였고, 전력이 약화되었다.
1999년부터 세성산 전투에서 희생된 농민군의 넋을 기리기 위한 위령제를 지내기 시작하였다. 2012년에는 희생자 위령비를 세우는 등 천안 지역 동학농민혁명을 추모하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