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도암재 강당
창녕 도암재 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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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창녕 도암재 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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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昌寧 道巖齋 講堂 |
주소 | 경상남도 창녕군 윗대암길 55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
지정(등록)일 | 2023년 03월 30일 |
분류 | 유적건조물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1동 |
웹사이트 | 창녕 도암재 강당,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
해설문
국문
창녕 도암재 강당은 19세기 초에 창녕조씨 종중*의 재실** 겸 가문의 글방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도암재는 강당, 대문채, 일원각으로 이루어져 있는 기와집으로 모두 동쪽을 향해 있다. 강당이 가장 높은 곳에 있고, 그 아래로 대문각과 일원각이 위치한다. 도암재의 오른쪽에 고직사***와 부속건물이 있었으나 1990년대 소실되어 현재 초석****으로 자리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중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강당은 앞면 4칸, 옆면 1.5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2칸은 큰 마루로 되어 있고 양쪽에 온돌방이 있다.
대문채는 앞면 4칸, 옆면 1칸 규모로 왼쪽부터 온돌방 1칸, 대문 1칸, 창고 2칸으로 이루어져 있고 앞쪽으로 15단의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일원각은 시조 영적비를 보호하는 비각*****으로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강당보다 늦은 시기에 지어졌으며 형태적으로 높은 위계******를 강조하였다. 내부의 시조 영적비는 고종 29년(1892)에 창녕조씨 일가인 이조참판 조인승(曺寅承, 1842~1896)이 당대의 학자이자 문장가로 유명한 이건창(李建昌, 1852~1893)에 비에 새길 글자를 요청하여 만들었는데 이는 지방과 중앙 가문 간의 긴밀한 협력 관계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도암재 강당과 일원각은 창녕조씨 문중에서 가장 중요한 위상을 지닌 상징적인 건축물일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발견된 고문서 및 시조 영적비 등의 자료와 더불어 19세기 중엽 창녕지역에 근거를 두고 활동하던 지배 계층 가문을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 종중(宗中): 성(姓)이 같고 본(本)이 같은 한 겨레붙이의 문중.
- 재실(齋室): 제사 전에 모여서 목욕재계하고 준비하는 의례용 장소.
- 고직사(庫直舍): 특정 건물이나 물품 따위를 지키고 감시하던 사람이 살던 집.
- 초석(礎石): 기둥 밑에 기초로 받쳐 놓은 돌.
- 비각(碑閣): 비를 세우고 비바람 따위를 막기 위하여 그 위를 덮어 지은 집.
- 위계(位階): 지위나 계층 따위의 등급.
영문
영문 해설 내용
도암재 강당은 19세기 초에 창녕조씨 가문의 제사를 지내고 문중 자제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지어졌다. 앞에서부터 대문채, 창녕조씨 시조를 기리는 비석을 모신 일원각, 강당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동의 기와건물은 모두 동쪽을 향해 있다. 오른쪽에는 고직사와 부속건물이 있었으나 1990년대에 소실되었다.
세 건물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강당은 2023년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앞면 4칸, 옆면 1.5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2칸은 큰 마루로 되어 있고 양쪽에 온돌방이 있다.
대문채는 앞면 4칸, 옆면 1칸 규모로, 왼쪽부터 온돌방, 대문, 창고로 이루어져 있다. 대문채 앞쪽에는 15단의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일원각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비각 안에 모셔진 비석은 1892년에 이조참판 조인승(1842-1896)이 세웠고, 비문은 당대의 학자이자 문장가로 유명한 이건창(1852-1893)이 지었다. 비석을 세울 때 지었던 원래의 비각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고, 지금의 비각은 1955년 이후 다시 세웠다.
도암재 강당과 일원각은 창녕조씨 문중에서 가장 중요한 위상을 지닌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또한 이곳에서 발견된 고문서 및 시조 영적비 등의 자료와 더불어 19세기 중엽 창녕지역에 근거를 두고 활동하던 지배 계층 가문을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