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금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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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금호재
Geumhojae Ritual House, Changnyeong
창녕 금호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창녕 금호재
영문명칭 Geumhojae Ritual House, Changnyeong
한자 昌寧 琴湖齋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대합면 대동리 265
지정(등록) 종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62호
지정(등록)일 1988년 12월 23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창녕 금호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금호재는 금헌 이장곤(琴軒 李長坤)의 제사를 지내는 건물로, 용흥사의 부속 건물을 1966년에 이곳으로 옮겨와서 이장곤의 제사 건물로 삼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장곤은 조선시대 문신(文臣)으로, 조선 중종(1506~1544 재위) 때 병조판서*로서 기묘사화에 가담하였으나 관직에서 쫓겨났다. 이후 다시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자연을 즐기다 창녕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건물은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로, 전체적으로는 ‘ㅁ’자형 배치를 하고 있다. 지붕은 옆에서 보면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며 대청과 온돌방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방의 출입문은 기능적인 면과 장식적인 면 모두를 갖춰 실용성이 돋보인다.


  • 병조판서 : 조선 시대에 둔, 군사와 역에 관한 일을 맡은 병조의 으뜸 벼슬

영문

Geumhojae Ritual House, Changnyeong

This ritual house was built for the preparation of ancestral rituals and the maintenance of the tomb of Yi Jang-gon (1474-?), a civil official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Yi Jang-gon’s tomb is located 1 km to the northeast at the foot of a mountain.

After passing the state examination in 1502, Yi Jang-gon served various official posts but was implicated in the literati purge of 1504 and exiled to Geojedo Island the next year. After he was released from exile in 1506, he was appointed again as a government official in 1508. Because he excelled in both scholarly studies and martial arts, he was trusted by King Jungjong (r. 1506-1544), serving various high posts and becoming the minister of punishments in 1519. In the same year, Yi became unwittingly involved in a literati purge to remove scholars from the opposition faction, but after realizing the true nature of the plan, he opposed it and was thus dismissed from his post. Afterward, he refused to serve any official posts and led a secluded life, before eventually dying in Changnyeong.

It is unknown when this ritual house was first established. It is said that in the 17th century, an auxiliary building from the nearby Yongheungsa Temple was relocated to be used as this ritual house. The ritual house was relocated two more times, before it was moved to its current location in 1966. At that time, the main gate and auxiliary buildings were added. The main quarters has a wooden-floored hall at the center with an underfloor-heated room on either side, in front of which are narrow wooden verandas.

영문 해설 내용

조선시대의 문신 이장곤(1474-?)의 묘소를 관리하고 제사를 준비하기 위해 지은 재사이다. 이곳에서 북동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산 기슭에 이장곤의 묘소가 있다.

이장곤은 1502년 과거에 급제한 후 벼슬길에 나갔으나, 1504년 사화에 연루되어 이듬해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1506년 유배에서 풀려난 뒤 1508년 다시 관직에 기용되었다. 학문과 무예를 겸비하여 중종(재위 1506-1544)의 신임을 받았으며,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1519년에는 병조판서가 되었다. 같은해 사화를 일으키는 데 가담하였으나 신진 사류를 처형하는 것에 반대하였고, 이 때문에 관직에서 쫓겨났다. 이후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다가 창녕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 건물이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17세기에 창녕에 있었던 용흥사라는 절의 부속 건물을 옮겨 지었다고 전해진다. 두 차례의 이건 끝에 1966년 현재의 위치에 자리를 잡았으며, 이 때 경내에 있는 대문과 관리사 등의 부속 건물들을 새로 지었다. 본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이 있으며, 온돌방 앞으로는 툇마루가 있다.

참고 자료


  • 건물의 건립시기 언급 애매 : 용흥사는 17세기에 있었다고 하는데, 건물 공포에는 ‘병오년’이라고 되어 있고, 상량문에 1886년이라고 남아있음. 17세기에 지어진 건물을 1886년에 보수한 것으로 판단되나 개인적 추측이므로 내용에 포함시키지 않았음.
  • 이장곤은 1695년 연암서원에 배향되었으나, 연암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사라졌다고 함. 용흥사에 대한 언급에서는 1695년이라는 년도가 많이 등장하는데, 둘 사이를 연관지어 설명하는 것은 근거가 더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내용에 포함시키지 않았음.
  • 금호재는 완만한 경사가 있는 대지의 높은 곳에는 강당을 두고 맞은편에 솟을삼문을 두고 좌우측에는 동·서재를 두어 튼 口자형으로 배치하였다. 강당과 동·서재 사이에 담장을 쌓아 두 공간을 분리하였으며 출입은 작은 협문(由正門)으로 하고 있다. 재실의 우측에는 사당을 세워 서원으로 발전하여 현재의 강당은 금호재에서 금호서원으로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