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이충무공 진배미 유적지
진주 이충무공 진배미유적지 Historic Site Related to Admiral Yi Sun-sin, Jinj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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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진주 이충무공 진배미유적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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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Historic Site Related to Admiral Yi Sun-sin, Jinju |
한자 | 晉州 李忠武公 陣배미 遺蹟地 |
주소 |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원계리 717 - 18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남도 기념물 제16호 |
지정(등록)일 | 1974년 12월 28일 |
분류 | 유적건조물/인물사건/역사사건/역사사건 |
수량/면적 | 3,234㎡ |
웹사이트 | 진주 이충무공 진배미 유적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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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진배미 유적은 임진왜란 당시 백의종군(白衣從軍)하던 충무공 이순신이 말을 달리고 군사를 점검하던 곳이다.
『난중일기(亂中日記)』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이순신은 손경례 집에 머물렀는데 1597년 8월 3일에 손경례 집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교서를 받으면서 이곳이 백의종군의 마지막 장소가 되었다.
이곳을 충무공 이순신이 군사를 점검한 유적지라 하여 ‘진(陣)배미’라 부르고 있다.
1975년 나라에서 충무공 이순신의 호국정신과 얼을 기리기 위해 ‘이충무공군사훈련유적비(李忠武公軍事訓鍊遺蹟碑)’를 세웠다.
■ 난중일기(1597년 8월 3일) 내용 : 맑음,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梁濩)가 뜻밖에 들어와서 교서(敎書)와 유서(諭書)를 가져왔는데 분부의 내용인 즉, 겸삼도 통제사(兼三道統制使)의 명령이다. 숙배(肅拜)한 뒤에 받자온 서장을 써서 봉해 올리고 곧 길을 떠나 .......
영문
Historic Site Related to Admiral Yi Sun-sin, Jinju
This is the site where the renowned Admiral Yi Sun-sin (1545-1598) trained his military troops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1597-1598.
In recognition of his successful campaigns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1592-1593, Yi was promoted to commander of the Navy of the Three Provinces in 1593. In April 1597, he was falsely accused of treason and was arrested and sent to the capital, where he was demoted to the rank of a soldier. During his time as an ordinary soldier, he was stationed in this village where he stayed at the house of a man named Son Gyeong-rye. This is recorded in Admiral Yi’s daily journal, entitled War Diary (Nanjung ilgi). When the Japanese invaded again in late August 1597, the new commander of the Navy of the Three Provinces was blindsided by the attack and died in battle, so the skilled Yi Sun-sin was reinstated to his former position. From this village, he then proceeded with the inspection of the troops and trained his military. In October, Yi Sun-sin gained an important naval victory over the Japanese fleet in the Battle of Myeongnyang.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조선시대의 명장인 이순신(1545-1598)이 정유재란 때 군사를 훈련시키던 곳이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에서의 연이은 활약으로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억울한 모함을 받아 1957년 4월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일반 군인의 신분으로 강등되었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이 기간 동안 이순신은 이 마을에서 손경례라는 사람의 집에 머물렀다. 1597년 8월 일본이 다시 침략하자 당시 삼도수군통제사가 기습을 당해 전사하였고,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한다는 교서를 받게 되었다. 이후 그는 이곳에서 군사들을 점검하고 훈련을 시켰으며, 10월에는 명량 해협에서 일본 수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참고자료
- '백의종군' 관련 내용 (쉽게 쓰려면 지금처럼 너무 길어져 원문에는 최대한 간략하게 작성하려 노력함.) - 이순신은 부산포의 왜군을 공격하라는 선조의 명을 따르지 않은 것이 이유가 되어 1957년 4월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이후 약 4개월 동안 일반 군인의 신분으로 강등된 채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백의종군]. 7월 15일 거제도 인근의 칠천량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대패하고 사령관이었던 원균이 전사하자, 선조는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는 교서를 내리게 된다. 이순신이 남긴 『난중일기(亂中日記)』의 기록에 따르면, 이순신은 8월 3일 진주에 있으면서 머물렀던 손경례의 집에서 이 교서를 받게 되었으며, 진주는 백의종군의 마지막 장소가 되었다. 이후 이순신은 남아있던 13척의 배를 재정비해 9월 16일에 전라남도 진도의 명량 해협에서 10배가 넘는 규모의 일본 전함을 침몰시키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 명량대첩의 시작…진주 수곡면 손경례家를 찾아서, 경남일보, 2020.4.28. http://www.g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3474 -> 유적비 건립 시기가 1965년으로 되어 있으나, 진주 관광 (http://www.jinju.go.kr/02793/02258/02284.web?amode=view&idx=298) 홈페이지 내용에 의거해 원고에는 1975년으로 작성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