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의암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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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의암 사적비
Monument of Uiam Rock, Jinju
진주 의암사적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진주 의암 사적비
영문명칭 Monument of Uiam Rock, Jinju
한자 晉州 義巖 事蹟碑
주소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500-8번지
지정번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53호
지정일 2000년 1월 31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基
웹사이트 진주 의암사적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의암사적비는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전투(1593년)에서 성이 함락되고 민・관・군 7만 명이 순절하자 진주관기(官妓) 논개(論介)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죽은 사실을 기록한 빗돌이다.

빗돌은 1722년(경종2)에 세운 것으로 정식(鄭栻)이 빗글을 지었다. 논개에 대한 이야기는 유몽인(柳夢寅:1559~1623)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최초로 기록되어 1629년(인조7)에 정대륭(鄭大隆)이 논개가 순국한 바위에 ‘義巖(의암)’이라는 글자를 새기고, 1722년(경종2)에 사적비를 세우고 1740년(영조16)에 의기사(義妓祠)를 세웠다.

논개의 이야기가 나라의 인정을 받으면서 진주 사람들은 의기(義妓) 논개로 부르고 있다.

비각(碑閣)의 처마 밑에는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라는 정려*현판이 걸려 있다.


  • 정려: 충신이나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나 집 앞에 붉은 색 문을 세우고 표창하던 일

영문

Monument of Uiam Rock, Jinju

This stone stele, erected in 1722, honors the deeds of a young woman named Nongae (?-1593) who sacrificed her life for the country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1592-1593.

In 1593, Jinjuseong Fortress fell into the hands of the enemy. A celebratory banquet was held by the Japanese troops where Nongae performed. She lured a drunken Japanese general to the river bank, embraced him and, pulling him with her, threw herself into Namgang River, killing them both. The story of Nongae had been passed down orally until the scholar and writer Yu Mong-in (1559-1623) wrote it down in a collection of miscellaneous stories and made it known to the wider public.

In 1629, Jeong Dae-ryung (1599-1661), a Confucian scholar from Jinju, engraved Chinese characters on the rock from which Nongae is said to have jumped. The inscription reads “Rock of Righteousness.” In 1722, commoners and scholars of Jinju area joined forces to erect this stone stele. In 1741, a commemorative pavilion was built to house the stele. At the front of the pavilion a plaque with an inscription that reads “The Commemorative Gate of the Heroic Nongae.”

A portrait and spirit tablet of Nongae are enshrined in Uigisa Shrine (Gyeongsangnam-do Cultural Heritage Material No. 7) inside Jinjuseong Fortress.

영문 해설 내용

이 사적비는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논개를 기리기 위해 1722년에 세워졌다.

1593년 2차 진주성 전투로 성이 함락된 후, 일본군은 이곳에서 축하연을 열었고, 논개도 여기에 참석하였다. 논개는 술에 취한 왜장을 강가로 유인하였고, 그를 껴안은 채 남강에 몸을 던졌다. 그녀의 행적은 지역에서 구전되어 오다가 문신이자 문학가인 유몽인(1559-1623)의 야담집에 기록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629년 진주의 선비 정대륭(1599-1661)이 논개가 뛰어내린 바위에 ‘의암’이라는 글자를 새겼고, 1722년에는 진주 지역 백성과 선비들이 사적비를 세웠다. 비각은 1741년에 세웠으며, 정면에는 '의기 논개의 문'이라는 쓴 현판이 걸려있다.

진주성 안에는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인 의기사(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호)가 있다.

참고자료

  • 논개는 의기인가?, 지리산 자락 멍덕골 마을,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j2ansan/221781648036 -> 논개 신분 관련 ; 논개는 기녀가 아니라 사대부가 여인인데 어우야담에서 ‘진주 관기’라고 기록해 기녀로 알려지게 되었고, 1722년 경상우병사 최진한이 논개포상 요청으로 세운 '의암사적비'에 '의기'로 호칭되면서 ‘의기’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논개의 남편은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한 절도사 최경회이며, 아버지는 훈장을 하던 주달문이라고 한다. 전라북도 장수군에 논개 관련 유적이 남아있다.
  • 진주의 무형문화유산, 국립무형유산원, 2015, 의암별제 항목 중 -> 1722년 당시 경상우수사였던 최진한에게 호소하여 비석을 다듬어 준비했지만 세우지 못하고, 1741년 부임한 남덕하가 조정의 허락을 받아 비각을 지을 때 비석도 함께 세웠다. ; 사실정보가 다르므로 확인 필요함.
  • 진주의암사적비,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113803530000&pageNo=1_1_1_1 -> 진주의 사민(士民)들은 명암 정식(明庵 鄭拭:1683∼1746)이 지은 비문으로 경종 2년(1722)에 세웠다. 영조 16년(1740) 병사 남덕하(南德夏:1688∼1742)는 의기정포(義妓旌褒)를 계청하여 의기사를 창건하였고, 「의암사적비」에는 비각을 건립하여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라는 현판을 게시하였다.
  • 유적지 따라 이야기 따라 <4> 진주 촉석루 논개, 국제신문, 2013.1.31.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key=20130201.22031193750 -> 영조 14년(1738년) 남덕하가 경상우병사로 부임하자 논개 포상문제가 제기됐다. 남덕하는 진주 사람들의 건의를 수렴해 조정에 논개 사당과 사당 이름을 내려주도록 글을 올렸다. 이런 노력이 결실을 거둬 마침내 1740년 조정의 허락을 받아 촉석루 경내에 논개를 위한 사당인 의기사가 건립됐다.
  • 의암사적비, 한국산 호랑이, 네이버 블로그 http://blog.daum.net/kang72/11796379 -> 비각, 비석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