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 선생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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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 선생 묘
Tomb of Jeong Yu
대표명칭 정유 선생 묘
영문명칭 Tomb of Jeong Yu
한자 鄭裕 先生 墓
지정(등록) 종목 수원시 향토유산 제6호



해설문

국문

정유 선생 묘는 조선 중기의 인물인 정유(1503~1566)의 묘소이다.

정유는 조선 명종 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공작(公綽), 호는 양진당(養眞堂), 보진당(葆鎭堂)이다. 중종 32년(1537)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사헌부와 사간원, 홍문관 등 삼사(三司)*의 여러 벼슬을 거쳐 명종 10년(1555)에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또 황해도와 강원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명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묘는 통진현감(通津縣監)을 지낸 아버지 정수강 묘 하단에 서남향으로 자리 잡았다. 부인인 청주 한씨의 묘와 쌍묘를 이루고 있으며, 묘 앞에 묘비와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묘비는 서애 류성룡이 지은 비문을 석봉 한호가 쓴 것으로 학술적 가치가 크다. 원본은 수원박물관에 보관 중이며, 묘역에는 복제본이 설치되어 있다. 1990년에 수원시 향토유산 제6호로 지정되었다.


  • 사헌부(司憲府): 감찰 업무를 담당하는 관청이며, 그 수장을 대사헌이라 함. 사간원(司諫院): 왕에게 충고나 비판하는 업무를 담당한 관청. 홍문관(弘文館): 궁중의 학술 서적 관리와 왕에게 자문 역할을 하는 관청.
  • 관찰사(觀察使): 조선 시대에 각 도의 지방 통치를 담당하던 관직.

영문

Tomb of Jeong Yu

This tomb belongs to Jeong Yu (1503-1566), a civil official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and his wife, Lady Han. It was designated as a Suwon Local Heritage in 1990.

Jeong Yu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537 and went on to serve in various official posts. In particular, he became beloved by King Myeongjong (b. 1534, r. 1545-1567) while holding positions at the Three Offices, which monitored for corruption, remonstrated the king as needed, and answered the king’s questions. He also served as governor of Hwanghae-do and Gangwon-do Provinces and visited Ming China as a royal envoy.

The tomb consists of two burial mounds and several stone sculptures, including a tombstone, a table, an incense table, a pair of pillars, and a pair of civil official statues. The tombstone is a replica of the original, which is kept at the Suwon Museum. The tombstone’s inscription was composed by the esteemed scholar Ryu Seong-ryong (1542-1607) and calligraphed by the renowned calligrapher Han Ho (1543-1605).

The pairs of burial mounds behind and in front of Jeong Yu’s tomb belong to his father and mother and his son and daughter-in-law, respectively.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조선시대의 문신인 정유(1503-1566)와 부인 청주한씨의 묘이다. 1990년에 수원시 향토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정유는 1537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지냈다. 특히 왕이나 신하의 잘못을 지적하고 각종 정책을 비판하는 삼사의 여러 관직을 맡았으며, 명종(재위 1545-1567)의 총애를 받았다. 황해도와 강원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정유의 묘역에는 두 개의 봉분이 있고, 묘비, 상석, 향로석과 망주석과 문인석이 한 쌍씩 있다. 묘비는 복제본이고, 원본은 수원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묘비의 비문은 류성룡(1542-1607)이 지었고, 비문의 글씨는 명필 한호(1543-1605)가 썼다.

두 봉분 위쪽에는 정유의 부모님의 묘가 있고, 아래쪽에는 아들 내외의 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