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헌 이석형 묘 및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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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헌 이석형 묘 및 신도비
Tomb and Stele of Yi Seok-hyeong
"저헌 이석형 묘 및 신도비", 『경기도 문화재 총람 - 2 도지정편』, 경기도, 2017, 242쪽.
대표명칭 저헌 이석형 묘 및 신도비
영문명칭 Tomb and Stele of Yi Seok-hyeong
한자 樗軒 李石亨 墓 및 神道碑
주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산 3
지정(등록) 종목 경기도 기념물 제171호
지정(등록)일 2000년 6월 12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기타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묘역일원,신도비1기
웹사이트 저헌 이석형 묘 및 신도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저헌 이석형(1415~1477)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세종 대부터 성종 대까지 활동한 관료이며 유학자이다. 그는 조선 최초로 세 가지 과거*에서 장원 급제하여 ‘삼장원’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석형은 세종 23년(1441) 문과에 장원 급제한 후 세종의 명으로 사육신과 함께 사가독서**를 했다. 14년간 집현전에서 근무하며 학문 연구와 편찬 사업에 임하였다. 그는 집현전 학사로 『고려사』, 『치평요람』, 『역대병요』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저서로는 『대학연의집략』, 『저헌집』 등이 있는데 필법이 신묘하고 문장과 글씨가 뛰어났다고 한다.

세조 2년(1456)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 사육신 사건***을 전해 듣고 그들의 절의****를 상징하는 시를 지어 익산 동헌에 남겼다. 이를 이유로 조정의 관리들이 이석형에게 죄를 물어야 한다고 하였으나 임금이 막아 주었다. 그 후에도 세조의 총애를 받아 황해도 관찰사, 사헌부 대사헌, 판한성부사***** 등의 중요 관직을 거쳐 성종 대에는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만년에는 성균관 서쪽 집 연못에 계일정******을 짓고 시문에 전념하였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묘는 그의 부인 연일 정씨와의 합장묘이다. 부인 정씨는 고려 말 충절의 표상인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증손녀로서 젊어서 세상을 떠나자 부친이 정몽주 묘 남쪽 언덕에 장사지냈으며, 후에 이석형을 합장하였다. 무덤에는 둥근 봉분(封墳) 앞에 여러 석물과 묘표(墓表)를 세웠다.

신도비********는 인조 2년(1624)에 세웠다. 좌의정 월사 이정구(李廷龜)가 비문을 짓고 선조의 사위 신익성(申翊聖)이 글씨를 썼으며,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이 전서(篆書)로 전액머리글자을 썼다. 신도비는 원래 묘 바로 아래에 있었으나, 현재는 이곳 연안 이씨 비각공원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 세 가지 과거: 조선시대 3년마다 열린 정기 시험인 식년시(式年試)에 치르는 세 가지 시험으로 소과(小科)를 일컫는 생원(生員)과 진사(進士) 시험, 그리고 대과인 문과(文科)를 말함.
  • 사가독서(賜暇讀書): 조선시대에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한 제도
  • 사육신 사건: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처형된 사건
  • 절의(節義): 신념을 굽히지 않는 꿋꿋한 태도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 판한성부사: 조선시대 한성부의 책임자로서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장과 같음
  • 계일정(戒溢亭): 물이 넘치는 것을 경계하듯 이름과 권력, 재물과 복을 얻는 데 항상 넘치지 않게 살라는 뜻으로 지은 정자
  • 시호(諡號): 왕·왕비를 비롯해 벼슬한 사람이나 학덕이 높은 선비들이 죽은 뒤에 그의 행적에 따라 국왕으로부터 받은 이름
  • 신도비(神道碑): 왕이나 고관의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을 기리는 비석

영문

Tomb and Stele of Yi Seok-hyeong

This is the tomb and stele of the civil official and scholar Yi Seok-hyeong (1415-1477, pen name: Jeoheon). The stele, which commemorates Yi’s life and achievements, was first erected in front of the tomb but it is now housed in a pavilion at the entrance to the cemetery of the Yeonan Yi Clan. His wife Lady Jeong is buried together with him in the same burial mound.

Yi Seok-hyeong was the first person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to place first in all three stages of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After passing the examinations in 1441, he served official posts at the Office of the Censor-General and the Hall of Worthies. In 1447, Yi was granted a leave by King Sejong (r. 1418-1450) to focus on his studies at Jingwansa Temple. Later, he served for another 14 years at the Hall of Worthies pursuing academic work and compiling various books. He participated in the compilation of works such as History of Goryeo (Goryeosa), the Exemplar for Efficient Government (Chipyeong yoram), and A Compiled History of War (Yeokdae byeongyo).

In 1456, when Yi was serving as governor of Jeolla-do Province, he received the news that King Sejo (r. 1455-1468), who had recently usurped the throne from his young nephew King Danjong (r. 1452-1455), had executed the civil officials who were trying to restore King Danjong to the throne. Yi composed a poem in honor of the loyalty of the executed officials. The court officials wanted to have him punished for this but were stopped by King Sejo who had a personal respect for Yi. Having gained the king’s favor, Yi was promoted to a number of important posts such as the governor of Hwanghae-do Province, inspector-general, and governor of Hanseong-bu District (today’s Seoul). In his later years, Yi built a pavilion at his house, located to the west of the National Confucian Academy (Seonggyungwan), where he spent the rest of his life enjoying writing and poetry. Yi was famous as a talented writer and calligrapher. His most well-known books are the Collected Works of Yi Seok-hyeong (Jeoheonjip) and the Essentials of the Extended Meanings of the Great Learning (Daehakyeonui jimnyak) which is a collection of texts providing guidance in politics and administration extracted from the Extended Meanings Great Learning (Daehak Yeonui) and the History of Goryeo (Goryeosa).

Yi’s wife Lady Jeong belonged to the Yeonil Jeong Clan and was a great-granddaughter of Jeong Mong-ju (1337-1392), a loyal subject of the Goryeo dynasty (918-1392). She died at a young age and was buried by her father on this hill to the south of Jeong Mong-ju’s tomb. Her husband Yi Seok-hyeong was buried with her later.

The stone sculptures in front of the tomb mound include a tomb marker, stone table, stone incense table, and two pairs of statues of civil officials. The stone table and the stone incense table were added later.

The stele of Yi Seok-hyeong, located at the entrance to the cemetery, was erected in 1624. The inscription on the stele was composed by the second state councilor Yi Jeong-gu (1564-1635), who was Yi’s great-great-grandson, and calligraphed by the calligrapher Sin Ik-seong (1588-1644), who was a son-in-law of King Seonjo (r. 1567-1608). The stele’s name was calligraphed by the civil official and calligrapher Kim Sang-yong (1561-1637). The stele consists of a rectangular pedestal and a marble body stone.

영문 해설 내용

조선시대의 유학자이자 문신인 이석형(1415-1477, 호: 저헌)의 묘와 신도비이다. 이석형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신도비는 원래 묘 바로 아래에 있었으나, 지금은 연안이씨 묘역 입구에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이석형의 묘에는 부인 연일정씨가 합장되어 있다.

이석형은 조선시대 최초로 생원시, 진사시, 문과의 세 시험에서 모두 장원 급제한 인물이다. 1441년 세 시험을 합격한 후 사간원과 집현전에서 근무하였으며, 1447년에는 세종(재위 1418-1450)의 명으로 휴가를 받아 진관사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후 14년간 집현전에서 근무하며 학문 연구와 편찬 사업에 매진하였고, 『고려사』, 『치평요람』, 『역대병요』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석형은 1456년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 세조(재위 1455-1468)이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뒤,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던 대신들을 처형하였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이석형은 처형된 대신들의 절의를 기리는 시를 지었고, 이를 이유로 조정의 관리들이 이석형에게 죄를 물어야 한다고 하였으나, 세조가 이를 막아 주었다. 세조의 총애를 받은 이석형은 이후에도 황해도 관찰사, 사헌부 대사헌, 판한성부사(한성 판윤) 등의 중요 관직을 지냈다. 만년에는 성균관 서쪽에 있던 집에 계일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시문에 전념하였다. 문장과 글씨가 모두 뛰어났다고 하며, 저서로는 『저헌집』과 『대학연의집략』 등이 있다. 『대학연의집략』은 『대학』의 주석서와 『고려사』에서 정치에 모범이 되고 경계해야 할 만한 글을 뽑아 엮은 책이다.

부인 연일정씨는 고려 말의 충신인 정몽주(1337-1392)의 증손녀이다. 젊어서 세상을 떠나자 부친이 정몽주의 묘 남쪽 언덕에 장사 지냈고, 이후 이석형을 합장하였다.

봉분 앞에는 묘표, 상석, 향로석, 문인석 2쌍이 세워져 있으며, 상석과 향로석은 후대에 만든 것이다.

신도비는 1624년에 세웠다. 이석형의 4대손이자 좌의정을 지낸 이정구(1564-1635)가 비문을 짓고, 선조(재위 1567-1608)의 사위이자 서예가인 신익성(1588-1644)이 글씨를 썼다. 비의 제목은 문신이자 서예가인 김상용(1561-1637)이 썼다. 화강암으로 만든 네모난 받침돌 위에 대리석 몸돌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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