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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죽헌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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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죽헌 고택
장흥 죽헌 고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장흥 죽헌 고택
한자 長興 竹軒 古宅
주소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 방촌길 101 (방촌리)
지정번호 전라남도 민속문화재 제6호
지정일 1986년 2월 7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수량/면적 일곽
웹사이트 장흥 죽헌 고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일반적인 옛날 주택의 공간구성은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이 다르고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의 위치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주택의 배치와 평면구성에 있어서도 대가족제에 따라 거처하고 활동하는 공간이 따로 구분되었다.

이 집은 한국 농촌의 전형적인 양반집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집은 전체적으로 동남향을 하여 배치되었고 안채와 사랑채가 있으며 헛간과 곡간채가 있다. 여인들이 거처하는 생활공간인 안채는 ‘ㅡ’자형으로 앞·뒤에 툇간이 있으며, 좌측으로부터 작은방 1칸, 대청 2탄, 큰방 2칸이다. 주춧돌 위에는 네모기둥을 세웠으며, 기단은 다듬은 돌을 바르게 쌓았다. 남자들의 생활공간인 사랑채는 ‘ㅡ’자형 5칸 겹집이며 낮은 기단위에 주춧돌을 놓았다. 기둥은 보이는 곳에 원형기둥이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이다.

집 앞의 솟을대문에는 건물을 지은 내력, 날짜와 시간 등을 적은 상량문(上樑文)이 남아 있어 1949년에 지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안채나 사랑채는 시기가 훨씬 올라가 20세기초(1910년대)로 추정된다.

수정 국문

초고

장흥위씨 위계창(魏啓昌, 1861~1943)의 고택으로 죽헌(竹軒)은 그의 당호이다. 위계창은 청계 위덕의(聽溪 魏德毅, 1540~1613)의 10대손이다. 위덕의는 임진왜란 때 장흥에서 의주까지 2천리를 걸어서 선조를 알현한 인물이다. 위계창은 한말 의병활동을 펼친 기우만(奇宇萬, 1846~1916), 정의림(鄭義林, 1845~1910) 등과 교유했다. 사랑채 죽헌에는 이들이 지은 시와 기문(記文)과 현판이 걸려 있다.

죽헌고택은 솟을대문의 상량문을 통해 1889년에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택은 사랑채와 안채, 사당으로 구성되었으며, 낮은 구릉지에 자리 잡고 있어 대문과 사랑채, 안채와 사당의 높낮이와 위계(位階)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사랑채는 정면 4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앞면에 차양 역할을 하는 처마 1칸을 덧달았다. 안채는 정면 7칸으로 상량문의 기록(병술년 4월 20일)을 보아 1886년에 건축되었거나 1946년에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안채 우측 뒤로 사당 한 칸이 있으며 사당에는 위계창의 신주(※ 확인 예정)를 모셨다.

1차 수정

죽헌고택은 장흥위씨 위계창(魏啓昌, 1861~1943)이 살던 집이다. 죽헌(竹軒)은 그의 호이다.

위계창은 위덕의(聽溪 魏德毅, 1540~1613)의 10대손으로, 위덕의는 임진왜란 당시 장흥에서 의주까지 2천리를 걸어서 선조(1567~1608 재위)를 알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죽헌고택은 대문채, 사랑채, 안채, 곳간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1910년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랑채는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앞면에 차양 역할을 하는 처마 1칸을 덧달았다. 한말 의병활동을 펼친 기우만(奇宇萬, 1846~1916), 정의림(鄭義林, 1845~1910) 등이 지은 시와 기문(記文)을 쓴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들은 위계창과 가깝게 교유하던 사이였다고 한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이 있고 왼쪽 끝에는 부엌이 있으며, 부엌 뒤편으로 마루방과 방이 하나씩 더 있다. 안채 오른쪽에 있는 사당에는 위계창의 신주를 모셨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대문채의 상량문에 “崇禎紀元後五回甲己丑三月上樑(숭정 기원(1628년) 후 5번째 돌아온 해인 1989년 3월에 상량을 했다)”이라 기록되어 있다. 안채는 상량문에 “歲丙戌四月二十日甲午竪柱…(병술년4월20일갑오에 기둥을 세웠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솟을대문의 상량문에 근거하여 1886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랑채도 이 무렵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 안채는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一자형으로 전후퇴를 가진 겹집이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 위덕의는 임진왜란 당시 장흥에서 -> 위덕의는 사마시에 합격한 생원으로 임진왜란 당시 장흥에서 로 수정
  3.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위계창은 청계 위덕의(聽溪 魏德毅, 1540~1613)의 10대손으로,

2차 수정

죽헌고택은 장흥위씨 위계창(魏啓昌, 1861~1943)이 살던 집이다. 죽헌(竹軒)은 그의 호이다.

위계창은 위덕의(魏德毅, 1540~1613)의 10대손으로, 위덕의는 임진왜란 당시 장흥에서 의주까지 2천리를 걸어서 선조(1567~1608 재위)를 알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죽헌고택은 대문채, 사랑채, 안채, 곳간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1886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사랑채도 이 무렵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랑채는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앞면에 차양 역할을 하는 처마 1칸을 덧달았다. 한말 의병활동을 펼친 기우만(奇宇萬, 1846~1916), 정의림(鄭義林, 1845~1910) 등이 지은 시와 기문(記文)을 쓴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들은 위계창과 가깝게 교유하던 사이였다고 한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이 있고 왼쪽 끝에는 부엌이 있으며, 부엌 뒤편으로 마루방과 방이 하나씩 더 있다. 안채 오른쪽에 있는 사당에는 위계창의 신주를 모셨다.

문맥요소

No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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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