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일선생 생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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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일선생 생가지
Birthplace of Yi Jong-il
이종일선생 생가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이종일선생 생가지
영문명칭 Birthplace of Yi Jong-il
한자 李鍾一先生 生家址
주소 충청남도 태안군 옥파로 199-7
지정(등록) 종목 충청남도 기념물 제85호
지정(등록)일 1990년 12월 31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탄생지
수량/면적 3,183㎡
웹사이트 이종일선생 생가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이종일 선생 생가지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이종일(1858~1925)이 나서 자란 집터가 있는 곳이다. 초가집으로 지은 이종일의 생가는 1986년에 옛 모습을 살려 다시 지은 것이다. 서쪽에는 1990년에 사당을 세워 이종일의 충절을 기리고 있으며, 유물과 함께 이종일의 생애와 업적을 소개하는 기념관과 체험관도 있다.

이종일은 태안의 양반 가문 중 하나인 성주 이씨 집안 출신으로 1858년(철종 9)에 태어나 15세가 되던 해인 1873년(고종 10) 문과에 급제하였다. 10여 년이 지난 1882년, 박영효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가 근대 일본의 모습을 보고 귀국한 후 개화운동에 앞장섰다. 지금의 초등학교인 보통학교 교장이 되어 교육에 힘쓰고, 10년 넘게 <대한황성신문>사장이자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신문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독립에 대한 의지와 실천을 북돋는 글을 전했다.

1896년에 독립협회가 활동을 시작하자 적극적으로 도왔고,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를 만난 후 천도교 활동을 시작하여 천도교가 경영하는 인쇄소인 보성사의 사장이 되었다. 순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하였고,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를 통해 일제에 대항하며 천도교 조직을 이용한 민중운동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1919년 3월 1일 3.1운동을 주도한 민족 대표 33명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해 독립선언문을 인쇄하고 전국으로 보냈는데 이 일로 인해 체포되어 2년 6개월간 감옥 생활을 하였다. 감옥에서 나온 후에도 제2의 3.1운동을 계획했지만 곧 들켜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끝까지 독립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영문

Birthplace of Yi Jong-il

This is where Yi Jong-il (1858-1925), an independence activist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was born and raised. The original house in which he was born was lost, and the current thatched-roof house was built in 1986. To commemorate Yi's life and achievements, a shrine was built in 1990, as well as a memorial hall and bronze statue.

Yi Jong-il was born in an upper-class family and from his youth, he was intelligent and highly praised. He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873 and visited Japan as a royal envoy in 1882. During this time, he was greatly impressed by what modern Japan looked like having accepted Western civilization, and after returning to Korea, he participated in the Enlightenment Movement. In 1896, he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activities of the Independence Club which sought to promote national self-reliance. In 1898, he published the first issue of the newspaper Jeguk Sinmun entirely in the Korean alphabet, Hangeul, as opposed to Chinese characters which was standard at the time. Until 1910, he acted as the newspaper's president and journalist, delivering messages encouraging people to cultivate and practice a strong will for national independence.

As one of the 33 National Leaders of the 1919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he printed the Korean Declaration of Independence and sent it nationwide. Due to this, he was arrested by the Japanese colonial authorities and was imprisoned for two years and six months. Shortly after being released in 1922, he planned a second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but was caught and failed. However, his will was unbreakable until the end, and he continued his efforts for independence until his death. In 1962, he was bestowed the Order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 by the Korean government in recognition of his achievements.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이종일(1858-1925)이 태어나고 자란 집이 있던 곳이다. 원래의 집은 없어졌으며, 현재의 초가집은 1986년에 지은 것이다. 이종일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90년에 사당이 세워졌고, 기념관과 동상 등도 세워졌다.

이종일은 태안 지역의 양반 가문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칭송이 자자하였다. 1873년 과거에 급제하였고, 1882년에는 사신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이때 서양문명을 받아들인 근대 일본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아 귀국한 후에 개화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1896년에는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한 독립협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1898년에는 순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하였다. 이후 1910년까지 신문사의 사장이자 기자로 활동하며, 독립에 대한 의지와 실천을 북돋는 글을 전했다.

1919년 3.1운동을 주도한 민족 대표 33명 중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문을 인쇄하고 전국으로 보냈는데 이 일로 인해 체포되어 2년 6개월간 감옥 생활을 하였다. 1922년 감옥에서 나온 직후에도 다시 제2의 3.1운동을 계획했지만 곧 들켜서 실패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의지를 꺾지 않았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주독립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