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석 선생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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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석선생묘
Tomb of Yi Gyeong-seok
이경석 선생 묘,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이경석선생묘
영문명칭 Tomb of Yi Gyeong-seok
한자 李景奭先生墓
주소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 50-7
지정(등록) 종목 경기도 기념물 제84호
지정(등록)일 1985년 9월 20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봉토묘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이경석 선생 묘,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이경석은 김장생의 문인으로 조선 인조 1년(1623)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후 문신으로서 최고의 영예였던 홍문관·예문관 대제학 등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현종이 ‘이경석의 문장이 아름다운 옥처럼 찬란하게 빛난다’고 칭찬했을 정도로 문장과 서예 실력이 뛰어났다. 그래서 병자호란 직후 「삼전도비(三田渡碑)」의 글을 짓는데 동원되기도 했다. 조정에서 물러난 뒤에는 현재 판교 지역에 은거하였다.

무덤에는 이경석과 부인 류씨가 함께 묻혀 있다. 묘역을 구성하는 일부 석물은 후대에 교체되거나 새롭게 마련하기도 하였으나 원형을 크게 잃지 않았다.

묘역에는 묘표와 신도비 양식의 비석이 있다. 묘표의 글은 이경석의 4대손 이광회(李匡會)가 지었고 글씨는 명필이었던 이광사(李匡師)가 썼다. 그리고 묘역 진입로에 있는 신도비는 박세당(朴世堂)이 글을 짓고 이광사가 써서 조선 영조 30년(1754)에 세웠다. 노론 문인들이 비문을 훼손하여 1975년 새 신도비를 세웠기 때문에 현재는 옛날 비석과 새로 세운 비석이 나란히 서 있다. 이경석 묘역의 묘표와 신도비를 제작할 때 당대의 유명한 학자와 명필로 손꼽히는 이들이 참여했고, 묘역과 조각의 양식도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되고 있다.

묘역 근처에는 이경석의 5대조 이효백과 아들 이철영 등의 묘역이 있어서 일대가 전주 이씨 덕천군파 신종군 계열 문중의 묘역임을 알 수 있다.

영문

Tomb of Yi Gyeong-seok

This is the tomb of Yi Gyeong-seok (1595-1671), a civil official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and his wife Lady Ryu.

Yi Gyeong-seok is a 6th-generation descendant of Yi Hu-saeng (1398-1465), the 10th son of King Jeongjong (r. 1398-1400). He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623, having been widely recognized for his writing and calligraphy skills. As a civil official, he served several official posts, including in the Office of Special Advisers and the Office of Royal Decrees, which were believed to be of the highest honor. In 1649, he was promoted to chief state councilor, the highest position in the government. Over the course of his 50-year career, he served three kings. In 1671, Yi fell into critical condition, so the king sent a royal physician and gave him medicine.

Seogun-dong is where Yi Gyeong-seok retired and spent his later years. The tombs of his family are also located in the area, including his son, Yi Cheol-yeong (1613-1662) and his 5th-generation ancestor Yi Hyo-baek (1433-1487).

Yi Gyeong-seok’s tomb consists of a tomb mound in front of which is a stone spirit seat, a stone table, a stone incense table, a pair of stone pillars, and a pair of stone statues of civil officials. Generally, a tombstone is erected in front of the tomb mound, but Yi Gyeong-seok’s tombstone, erected in 1751, stands to the right of the tomb. The tombstone’s inscription was composed by Yi Gwang-hoe (1706-1792), the 4th-generation descendant of Yi Gyeong-seok, and was calligraphed by the renowned calligrapher Yi Gwang-sa (1705-1777).

At the entrance of the tomb area, two steles recording the life and achievements of Yi Gyeong-seok stand side by side. The stele on the left is the original erected in 1754. Its inscription was composed by the prominent scholar and civil official Bak Se-dang (1629-1703) and was calligraphed by Yi Gwang-sa. However, Yi Gyeong-seok’s academic and political rivals had damaged the stele, so his descendants erected the black stele on the right in 1975.

영문 해설 내용

조선시대의 문신인 이경석(1595-1671)과 부인 류씨의 합장묘이다.

이경석은 정종(재위 1398-1400)의 열 번째 아들 이후생(1398-1465)의 6대손이다. 1623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문장과 서예 실력이 모두 뛰어났다. 문신으로서 최고의 영예로 여겨지던 홍문관(왕의 자문기관)과 예문관(왕의 교서를 짓는 일을 담당한 기관)의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1649년에는 최고 관직인 영의정에 올랐다. 50년 가까이 총 3명의 임금을 모셨고, 1671년 이경석이 위독하자 왕이 어의를 보내 약을 내리기도 하였다.

석운동은 이경석이 벼슬에서 물러나 만년을 보내던 곳이며, 석운동에는 이경석의 5대조 이효백(1433-1487)과 아들 이철영(1613-1662) 등 문중 인물들의 묘가 있다.

이경석의 무덤 앞에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 등이 있다. 묘비는 보통 무덤 정면에 세워지는데, 이경석의 묘비는 무덤 오른쪽에 세워져 있다. 묘비는 1751년에 세웠으며, 비문은 이경석의 4대손 이광회(1706-1792)가 짓고 명필 이광사(1705-1777)가 글씨를 썼다.

묘역 입구에는 이경석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2기의 신도비가 나란히 서 있다. 왼쪽이 1754년에 세운 원래의 비석이고, 저명한 학자이자 문신이었던 박세당(1629-1703)이 비문을 짓고 이광사가 글씨를 썼다. 그러나 이경석의 학문적, 정치적 라이벌들이 신도비를 훼손하였고, 후손들이 1975년에 오른쪽의 검은 비석을 새로 세웠다.

참고

  • 이후생-이효백-이귀정-이계수-이수광-이유간-이경직(이경석의 형)-이대성-이진검-이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