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계신도비 및 남원윤씨절행정판
유계 신도비 및 남원윤씨 절행정판 Stele of Yu Gye and Commemorative Plaque of Lady Yun |
|
대표명칭 | 유계 신도비 및 남원윤씨 절행정판 |
---|---|
영문명칭 | Stele of Yu Gye and Commemorative Plaque of Lady Yun |
한자 | 兪溪 神道碑 및 南原尹氏 節行旌板 |
주소 | 전라북도 익산시 성당면 와초리 |
지정(등록) 종목 | 문화재자료 제135호 |
지정(등록)일 | 1990년 6월 30일 |
분류 |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
수량/면적 | 1기 |
웹사이트 | "유계신도비 및 남원윤씨절행정판",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
해설문
국문
신도비란 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사람의 행적을 기록하여 무덤 근처에 세우는 비다. 유계신도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대학자인 유계(兪啓, 1607~1664)의 공적을 담고 있다. 유계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다가 유배당하였으며, 이후 대사헌·이조참판 등의 관직에 올랐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나라에서는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를 내려 그의 공적을 기렸다. 이 신도비는 영조 33년(1757)에 세웠으며 비의 글은 현종 9년(1668)에 송시열이 지었다.
남원윤씨 절행정판은 유계의 며느리인 숙인 남원윤씨의 절행에 대한 현판문이다. 상을 치르던 중 남편의 병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가 알려져 현종 10년(1669)에 정려문을 세우도록 하였고, 숙종 12년(1686)에 왕의 명을 받아 송시열이 현판문을 지었다.
영문
Stele of Yu Gye and Commemorative Plaque of Lady Yun
This stele records the life and achievements of Yu Gye (1607-1664), a civil official and prominent scholar of the late Joseon period. With the outbreak of the second Manchu invasion in 1636, Yu Gye insisted on resisting Qing China and was consequently exiled. Later he returned to the government and served various official posts. He was bestowed with the posthumous title of Munchung, meaning "a learned and loyal subject." The inscription on the stele was written in 1668 by Song Si-yeol (1607-1689), another prominent scholar of the late Joseon period. The stele was erected in 1757.
Next to this stele stands a pavilion housing the commemorative plaque for Lady Yun, a daughter-in-law of Yu Gye. When her husband became sick, she cut her finger and fed her blood to him in a desperate wish for him to recover. This story spread widely and a commemoration was bestowed to her in 1669. The inscription on the plaque was also written by Song Si-yeol in 1686.
영문 해설 내용
이 비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대학자였던 유계(1607-1664)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비다. 유계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다가 유배당하였다. 이후 복권되어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그의 학문과 충성을 기리기 위해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신도비의 글은 조선 후기 대학자인 송시열이 1668년에 지은 것이며 비는 1757년에 세워졌다.
비각 옆에는 유계의 며느리인 남원윤씨의 정려 현판을 보관하는 정려각이 있다. 남원윤씨는 남편의 병이 위독해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주었다. 이 이야기가 알려져 1669년에 정려가 내려졌으며, 1686년에 송시열이 현판문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