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왜성
| 울산왜성 Ulsan Japanaese Fortres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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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명칭 | 울산왜성 |
|---|---|
| 영문명칭 | Ulsan Japanaese Fortress |
| 한자 | 蔚山倭城 |
| 주소 | 울산광역시 중구 학성공원3길 54 일원 (학성동) |
| 지정(등록) 종목 | 울산광역시 문화유산자료 |
| 지정(등록)일 | 1997년 10월 30일 |
| 분류 |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
| 수량/면적 | 59,678㎡ |
| 웹사이트 | 울산 왜성,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
해설문
국문
울산왜성은 태화강과 동천강이 만나 동해로 유입되어 형성된 평야의 구릉에 쌓은 성이다. 선조 30년(1597)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설계하고 오타 카즈요시(太田一吉)의 감독 아래, 아사노 유키나가(淺野幸長)가 16,000명을 동원하여 40여 일 만에 쌓았다. 시루를 엎은 것 같다고 하여 증성(甑城)이라 하였고, 성을 쌓은 산 주변이 섬과 같아 도산성(島山城)이라고도 불렀다.
1597년, 1598년 두 차례에 걸쳐 조(朝)·명(明)연합군이 울산왜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되지 않았으며,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은 후 철수령에 따라 1598년 11월 18일,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왜성의 성채를 불태우고 물러났다.
울산왜성은 연곽식(蓮郭式)*의 평면구조로 학성산 꼭대기에 동서 100m, 남북 60m 규모의 중심 공간인 본환(本丸)과 그 북쪽 아래 해발 35m 지점에 동서 100m, 남북 50m 규모의 이지환(二之丸)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이지환의 서북쪽 아래 해발 25m 지점에 동서 40m, 남북 100m 규모의 삼지환(三之丸)을 덧붙여 쌓았다. 성내에는 본환의 북쪽과 동쪽, 이지환의 북쪽, 삼지환의 동쪽과 동북쪽에 출입구인 호구가 있었고, 창고 기능을 하는 노(櫓) 건물 12개소도 존재하였다.
1984년에 곡륜* 부분과 토성에 대한 발굴 조사를 처음 실시하였으며, 2011년에 외성(체성) 일부를, 2012년에 기와무지를 확인하였다. 2015년과 2016년에는 문지, 노대 기저부의 구조 및 축조 방법 등과 함께 문지도리석*으로 '절도사신공응기선정비(節度使辛公應基善政碑)'가 사용된 것을 확인하였다. 2019년, 2021년에는 문지, 성벽 축조 방식, 성을 쌓기 전 시기의 유구(遺構)도 알 수 있었다.
울산왜성은 1935년 일제에 의해 고적 제22호 ‘울산학성’으로 지정되었고, 대한민국 수립 이후 1963년 사적 제9호로 지정하였다. 1997년 1월 등급 조정으로 사적이 해제되고 같은 해 10월 울산광역시 문화유산자료로 지정하면서 이름을 울산왜성으로 고쳤다.
- 연곽식(蓮郭式): 병렬구조로 이어진 구획
- 곡륜: 성내에서의 기능이나 역할과 관련해서 구획 되어진 1개소의 구역 또는 공간
- 문지도리석: 문짝과 문설주를 잇는 문지도리가 꽂히는 돌
영문
Ulsan Japanaese Fortress
Ulsan Japanese Fortress was built in 1597 by Japanese troops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1598. Located on Hakseongsan Mountain, a hill situated in the plains between the Taehwagang and Dongcheongang Rivers before they meet and flow into the East Sea, the fortress is also known as Jeungseong, meaning “Steamer Fortress,” as it resembles an upturned earthenware steamer, or Dosanseong, meaning “Island Mountain Fortress,” as the area around the fortress resembles an island.
Designed by Katō Kiyomasa (1562-1611), the fortress was constructed in about 40 days by a force of 16,000 laborers managed by Asano Yoshigana (1576-1613) under the direction of Ota Kazuyoshi (?-1617). In both 1597 and 1598, allied Korean and Ming Chinese forces attempted to capture the fortress but were unsuccessful. After Japanese troops were disbanded upon the death of Toyotomi Hideyoshi (1537-1598), Katō Kiyomasa burned down the fortress on the 18th day of the 11th lunar month of 1598 before fleeing Korea.
The earthen fortress and its stone walls underwent several excavations between 1984 and 2021. The fortress consists of three enclosures arranged side by side along the mountain slope: the core enclosure at the top, the secondary enclosure to the north at an elevation of 35 m, and the tertiary enclosure to the northwest at an elevation of 25 m. Respectively, the enclosures measure 100 m by 60 m, 100 m by 50 m, and 40 m by 100 m along the east-west and north-south axes, with gates at the north and east, north, and east and northeast. The sites of 12 storage buildings were also discovered.
Notably, a stone used to prop up a door panel was discovered at the site of the eastern gate of the core enclosure in 2015. This stone was revealed to be a stele commemorating the benevolent governance of Sin Eung-gi, who served as the army commander of East Gyeongsang-do Province in the 1580s. This finding shows that the stone materials of the Military Headquarters of East Gyeongsang-do Province in Ulsan were used in the construction of the Japanese fortress and that the Japanese troops intentionally sought to defile Korea’s honor through the construction of the fortress.
영문 해설 내용
울산왜성은 임진왜란 때인 1597년 일본인들이 쌓은 성이다. 태화강과 동천강이 만나 동해로 유입되며 형성된 평야의 학성산 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시루를 엎어놓은 것 같다고 하여 증성이라고도 하고, 성을 쌓은 산 주변이 섬과 같아 도산성이라고도 불렀다.
울산왜성은 가토 기요마사(1562-1611)가 설계하고 오타 카즈요시(?-1617)의 감독 아래, 아사노 유키나가(1576-1613)가 16,000명을 동원하여 40여 일 만에 쌓았다. 1597년과 1598년 두 차례에 걸쳐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이 이 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되지 않았다. 토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가 죽은 후, 조선에 주둔하고 있었던 일본군들이 모두 철수하였는데, 이에 따라 1598년 11월 18일 가토 기요마사도 울산왜성의 성채를 불태우고 떠났다.
1984년에 곡륜 부분과 토성에 대한 발굴 조사가 처음 실시된 이후 2021년까지 여러 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울산왜성은 본환, 이지환, 삼지환이 나란히 배치된 구조이다. 산 꼭대기에 본환이 있고, 그 북쪽 아래 해발 35m 지점에 이지환이 있으며, 이지환의 서북쪽 아래 해발 25m 지점에 삼지환이 있다. 본환 동서 100m, 남북 60m, 이지환 동서 100m, 남북 50m, 삼지환 동서 40m, 남북 100m 규모이며, 본환의 북쪽과 동쪽, 이지환의 북쪽, 삼지환의 동쪽과 동북쪽에 출입구가 있었다. 창고 기능을 하는 건물도 12개소가 있었다.
특히 2015년에는 본성 동쪽 문터에서 문짝을 여닫기 위해 받치던 석재가 발견되었는데, 1580년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였던 신응기의 선정을 기리는 비석이었다. 경상좌도 병영성의 석재를 사용해 울산왜성을 지었음을 알 수 있으며, 조선을 철저히 유린하고자 했던 왜군들의 자세를 보여준다.
참고자료
- “[성곽도시 울산을 말하다]왜성서 출토된 유적에서 울산읍성·병영성의 흔적 보여”, 경상일보, 2017.06.12. https://www.ks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598599
- 곡륜과 왜성 구조 관련해서 다음 참조 → https://en.wikipedia.org/wiki/Kuruw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