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 Historic Site Related to Yun Bong-gil, Yes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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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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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Historic Site Related to Yun Bong-gil, Yesan |
한자 | 禮山 尹奉吉 義士 遺蹟 |
주소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산40-1번지 |
지정(등록) 종목 | 사적 제229호 |
지정(등록)일 | 1972년 10월 14일 |
분류 | 유적건조물/인물사건/근대인물/광복운동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141,007㎡ |
웹사이트 |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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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해설문
국문
광현당 光顯堂
광현당은 윤봉길 의사가 1908년 6월 21일에 아버지 윤황과 어머니 김원상의 장남으로 태어나 4세까지 살던 집이다. 윤봉길 의사는 고려 시대 명장 문숙공 윤관 장군의 후예로, 본명은 우의, 아호는 매헌이며 봉길은 스스로 붙인 별명이다.
광현당이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윤봉길 의사의 증조부인 윤자 때부터 이곳에서 살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윤봉길 의사는 훗날 이 집의 사방으로 냇물이 흐르는 모습이 섬과 같다고 하여 이곳을 한반도 가운데 위치한 섬이란 뜻의 ‘도중도’라고 불렀고, 일제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라 하여 이곳에서 독립운동의 앞날을 설계하였다.
1974년 정부에서 낡고 헌 부분을 수리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저한당 狙韓堂
저한당은 ‘한국을 건져 내는 집’이라는 뜻이며, 독립운동가 매헌 윤봉길(梅軒 尹奉吉) 의사가 4세였던 1911년에 아버지 윤황을 따라 이사와 살던 집이다. 5남 2녀 가운데 장남인 윤봉길 의사는 동생들과 우애가 남달랐고, 어린 시절 이 집에서 여러 학문을 익혔다. 윤봉길 의사는 1930년 항일투쟁을 위해 만주로 망명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살며 민족운동을 꾸준히 펼쳤다. 따라서 1932년에 윤봉길 의사가 순국하고 1945년에 해방이 되던 날까지 저한당은 일제의 탄압과 감시를 받았다.
1972년 8월까지 윤봉길 의사의 유족이 이곳에서 살았으며, 10월에 저한당을 비롯한 윤봉길 의사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1974년에 낡고 헌 부분을 수리하였다.
부흥원 復興院
부흥원은 윤봉길 의사가 문맹 퇴치를 위해 세운 교육 기관이다. 윤봉길 의사는 한 청년이 글을 몰라 공동묘지 팻말을 모두 뽑아 들고 와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달라고 한 사건을 계기로 농촌 계몽 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처음에는 저한당의 사랑방에서 야학당으로 시작하였고 점차 인원이 늘면서 부흥원을 세웠다.
부흥원에서는 주로 배운 내용을 발표하고 책을 읽고 함께 토론하는 학술 활동을 했으며, 공동구매와 저축, 지역 특산물 애용, 부업 활성화 등 생활을 개선하는 계몽 활동도 펼쳤다. 또 윤봉길 의사는 농촌 개혁 운동을 추진할 사람을 모아 월진회를 세우고 건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하자는 뜻으로 수암체육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어려운 일이나 초상을 당했을 때 서로 도와주는 위친계 활동을 하는 등 지역민이 화합하는 여러 활동을 펼쳤다. 1928년 2월 25일에 윤봉길 의사가 부흥원의 대들보에 상량을 축하하는 글을 직접 써 상량식*을 하였고, ‘지식 쌓기, 가난 극복, 단결’을 목표로 매월 14일에 농촌 계몽 애국 강연회를 열어 농촌 계몽 정신과 애국정신을 전파하였다. 대들보는 윤봉길 의사의 다른 유품과 함께 보물 제568호로 지정되어 윤봉길의사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부흥원의 지금 모습은 1974년 충의사 성역화 사업을 추진할 때에 복원한 것이다.
- 상량식: 새로 지은 건물에 재난이 없도록 땅과 집의 신에게 지내는 제사
영문
Gwanghyeondang House
This is the house where Yun Bong-gil was born on June 21, 1908. He lived in this house before his family moved to Jeohandang House in 1911.
He was the eldest son among the seven children of Yun Hwang and Kim Won-sang. His original name was U-ui, but has been widely known with his nickname, Bong-gil.
It is unknown when this house was built, but it was used by Yun’s family from the time of his great-grandfather. Yun named this house Dojungdo, meaning “an island at the center of the Korean Peninsula,” as the house was once surrounded by streams flowing on its each side.
The house was renovated in 1974 and was named Gwanghyeondang, meaning “a house where a light appears.”
Jeohandang House
This is the house where Yun Bong-gil lived from 1911 to 1930.
Yun Bong-gil had four brothers and two sisters, and they were devoted to one another. He committed himself to studying and promoted various national movements in this house, before he fled to Manchuria in 1930 to participate in the independence movement against the Japanese imperialists. After he left, the house was under constant surveillance by the Japanese police until Korea’s liberation in 1945.
Yun’s surviving family lived here until August 1972, two months before the house and other buildings and sites were designated as a historic site. The house was renovated in 1974.
Buheungwon School
This is a private local school established in 1928 by Yun Bong-gil to promote literacy and rural enlightenment.
One day before the school’s establishment, Yun met a young man who brought all the tomb markers from a nearby cemetery. The young man was illiterate and wanted to find out his father’s tomb. Shocked at the ignorance and negligence of this young man, Yun founded a school at the men’s quarters of his house.
Later, he built a school building in 1928 to accommodate the increased number of students. He also organized many clubs for reading and discussion, rural enlightenment, sports activities, and mutual assistance. Yun delivered a lecture on rural enlightenment and patriotism on the 14th of each month to achieve those three goals, namely, to eradicate ignorance, conquer poverty, and promote the power of unity.
The current school building was reconstructed in 1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