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금성대군 신단
영주 금성대군 신단 Altar for Prince Geumseong, Yeongj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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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영주 금성대군 신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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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Altar for Prince Geumseong, Yeongju |
한자 | 榮州 錦城大君 神壇 |
주소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70번지 일원 |
지정(등록) 종목 | 사적 제491호 |
지정(등록)일 | 2007년 10월 30일 |
분류 |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2,654㎡ |
웹사이트 | 영주 금성대군 신단,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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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금성대군(錦城大君, 1426~1457)은 조선 세종의 여섯째아들이자 단종의 작은아버지이면서 세조의 동생으로 이름은 유(瑜)이다. 신단은 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흙이나 돌로 쌓아 올려 주변보다 높게 만든 단(壇)을 말한다.
금성대군은 세조 2년(1456)에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단종 복위(復位)* 운동을 추진하다 순흥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순흥 부사 이보흠(李甫欽) 및 지역 사림*과 더불어 다시 단종 복위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거사를 추진했던 사람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고 순흥부도 폐지되었다. 이후 숙종 9년(1683)에 순흥부가 다시 설치되고 금성대군을 비롯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신분도 복원되었다.
숙종 45년(1719)에 순흥 부사 이명희(李命熙)가 요청하여 사건과 관련된 옛터인 유허지(遺墟址)에 신단을 설치하였다. 순흥에서는 금성대군을 신처럼 모시고 있어서 금성대군 제단에 신단이란 이름을 붙였다. 영조 18년(1742)에 경상 감사 심성희(沈聖希)가 요청하여 제사를 모시는 제단인 단소(壇所)를 정비하였다. 단소는 돌로 만든 3개의 단을 품(品)자처럼 배치한 모양이다. 금성대군 신단은 중앙 뒤쪽에 있고 앞의 동쪽 단은 이보흠을 모신 단이며 서쪽 단은 함께 순절한 선비들을 추모하는 단이다. 1980년 무렵 단소 앞에 제사를 지내는 건물인 재청(祭廳)과 제사를 준비하는 건물인 주사(廚舍)를 건립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매년 봄과 가을에 유림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
금성대군 신단은 단종 복위 운동과 관련된 유적으로 18세기 탕평(蕩平)* 정치의 움직임이 활성화되고 왕에 대한 의리를 다시 강조하는 정치적 분위기와 관련이 깊은 곳이다. 조선 시대에 사람을 신격화하여 만든 제단이 극히 드물다는 점에서 당시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 사육신 :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처형된 여섯 명의 충신
- 복위 : 폐위되었던 왕이나 왕의 아내가 다시 그 자리에 오름
- 사림 : 유학을 신봉하는 무리, 유림
- 탕평 : 조선 영조 때에 당쟁의 폐단을 없애려고 각 당파에서 고르게 인재를 등용하던 정책, 탕평책
영문
Altar for Prince Geumseong, Yeongju
This altar was built to honor Prince Geumseong (1426-1457), the sixth son of King Sejong (r. 1418-1450).
When his older brother Prince Suyang (i.e. King Sejo, r. 1455-1468) usurped the throne from their nephew King Danjong (r. 1452-1455), Prince Geumseong was outspoken in opposing the coup. As a result, he was exiled to the Sangnyeong area (today's Yeoncheon and Cheolwon). The next year, he plotted to reinstate Danjong to the throne, but his plan was compromised, and he was exiled again to the Sunheung area (today's Yeongju). During this exile, he and the local magistrate Yi Bo-heum (?-1457), as well as other scholars, planned again to return the throne to Danjong, but they were exposed, convicted of treason, and executed.
Because of its connection to the treason incident, the Sunheung Prefecture was abolished and annexed to a neighboring administrative unit. Later in 1683, the district was re-established, and the men executed for treason had their honor posthumously reinstated.
It is said that an altar honoring Prince Geumseong was first built in 1719 in the area of his exile and was later moved to its current location in 1742. The altar is located atop a stone platform. To the left of the altar is a stele that records the life and achievements of Prince Geumseong. On the same stone platform, in front of the altar honoring Prince Geumseong, are two additional altars. The one on the right is dedicated to Yi Bo-heum and the one on the left is dedicated to the other executed scholars. In 1980, two buildings were constructed in front of the platform to be used in the preparation and performance of veneration rituals which are held twice a year in spring and autumn.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조선 세종(재위 1418-1450)의 6번째 아들 금성대군(1426-1457)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제단이다.
금성대군의 형인 수양대군(후의 세조, 재위 1455-1468)은 조카 단종(재위 1452-1455)을 폐하고 왕위에 올랐다. 금성대군은 이에 반대하다가 삭녕(지금의 경기도 연천과 강원도 철원 지역)으로 유배되었으며, 이듬해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되어 다시 순흥(지금의 영주 지역)으로 이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순흥 부사인 이보흠(?-1457)과 지역 선비들과 함께 단종 복위를 모의하였으나, 거사 전에 발각되어 모두 반역죄로 처형 당했다.
순흥부는 역모가 일어난 지역이라는 이유로 폐지되었고, 인근의 다른 행정구역으로 복속되었다. 그러나 1683년에 순흥부가 다시 설치되었고, 당시 죽임을 당한 사람들도 신원되었다.
금성대군을 기리는 제단은 원래 1719년 금성대군이 유배되어 머물렀던 자리에 설치되었다고 하며, 1742년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제단은 석축 위에 설치되어 있으며, 제단 왼쪽에는 금성대군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비석이 있다. 3개의 제단 중 뒤에 있는 것이 금성대군의 제단이고 앞의 두 제단은 각각 오른쪽은 이보흠, 왼쪽은 당시 함께 순절한 선비들을 추모하기 위한 제단이다. 1980년 제사를 지내는 건물과 제사 준비를 위한 건물을 제단 앞에 건립하였고, 지금까지도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올린다.
- 금성대군이 유배되었던 자리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기로 함.
참고자료
- 금성대군파 약사,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http://www.rfo.co.kr/view_party.php?refnum=052 -> 소수서원 뒤편으로 100m쯤 가면 `금성단(錦城壇)'이라 쓴 문이 보인다. 소재지는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이다. 100평 가량의 터에 담장을 치고 상석 셋을 놓았다. 1719년(숙종 45) 순흥부사 이명희(李命熙)가 이곳에 단소(壇所)를 설치하였으며, 1742년(영조 18) 경상감사 심성희(沈聖希)가 3개의 단을 세웠던 것이다. 상단은 금성대군, 좌단은 금성대군과 모의해서 단종대왕 복위를 꾀했던 이보흠 부사, 우단은 연루되어 죽음을 당한 사림들, 즉 순의사(殉義士)들의 위패를 모신 제례소로 매년 춘추로 향사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1㎞쯤 서북쪽으로 가면 참혹한 한이 서린 금성대군의 위리안치소가 있다. / 모반사건이 탄로나자 주모자들은 물론 사방 10리 거리에 있는 세 살 이상의 양반 남자는 모조리 즉결로 목을 베었다. 집은 모두 불태우고 헐어버렸으며 도호부(都護府)는 산산조각 내어 다른 지방에 복속시켰다. 사람 뿐 아니라 마을 자체를 없애버리는 잔인한 징벌을 가했다. 죽계(竹溪)는 그때 피로 물들어 지금도 `핏걸'이라 불리운다.
- 숙종실록 13권, 숙종 8년 1월 13일 신유 2번째기사 - 경상도 순흥에 부를 다시 설치하다,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sa_10801013_002
- 금성대군 신단, 디지털영주문화대전 http://yeongju.grandculture.net/yeongju/toc/GC07400503 -> 영주 금성대군 신단 왼쪽에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가 세워져 있다. / 영주 금성대군 신단에서 북서쪽으로 약 420m 떨어진 곳에 금성대군 위리안치지가 있다. 이후 금성대군 위리안치지는 폐허가 되었다가 1991년 돌로 우물 모양의 구덩이를 조성해 놓았다.
- 영주의 유적, 금성대군 신단(錦城大君 神壇) 180421, 겨울섬, 개인 블로그 https://gotn.tistory.com/499
- 단종의 슬픔을 간직한 곳, 금성대군신단, 이야기 옷을 입은 경북 문화재 기행, 문화재청,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