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군 이전 묘역
영산군 이전 묘역 Tomb of Yi Je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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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영산군 이전 묘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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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Tomb of Yi Jeon |
한자 | 寧山君 李恮 墓域 |
주소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 39 산39, 산103-1 |
지정(등록) 종목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6호 |
지정(등록)일 | 2007년 2월 15일 |
분류 | 유적건조물/무덤/왕실무덤/조선시대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분묘 1基, 석물 10基, 토지 344㎡ |
웹사이트 | 영산군 이전 묘역,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해설문
국문
이곳 묘역은 조선 제9대 성종(成宗)의 13남인 영산군(寧山君 : 1490~1538) 이전(李恮)과 그 아들인 장흥군(長興君) 이상(李祥), 손자 덕원도정(德源都正) 이경의(李鏡義), 증손자 강진부정(康津副正) 이종(李琮) 등 4대에 걸친 묘역으로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의 묘제의 변화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영산군(寧山君)의 묘역과 문인석, 장명등 등 묘역 내 배치된 석물들은 당대의 전형적인 형식으로서 학술 가치가 매우 높다.
생모는 숙용심씨(淑容沈氏)이며, 연산군 시절 승마경주로 진성대군(중종)의 목숨을 구한 일화는 유명하다.
1506년(중종 1) 중신들과 반정을 도모하여 연산군(燕山君)을 폐위시키고 중종을 추대하여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 1등에 책록된다.
그러나 1523년(중종 18) 박영문(朴永文)ㆍ신윤무(辛允武) 등의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황해도 배천(白川)으로 유배되었다가 1527년(중종 22) 삼공(三公)의 건의로 사면된다. 그 후 북한산록 진관한촌(津寬寒村 : 현재 재말)으로 물러나 자연을 벗삼다가 1538년(중중 33) 향년 49세로 정침에서 타계하였다.
묘는 쌍분(雙墳) 삼위장(三位葬)으로 향좌측의 묘는 영산군과 첫 부인인 금릉군부인(金陵郡夫人) 청송심씨와의 합장묘이고, 향우측의 묘는 둘째부인인 교성군부인(交城郡夫人) 경주정씨의 묘이며, 향우측 기슭엔 셋째부인인 군부인(郡夫人) 함흥황씨의 묘가 있다.
금릉군부인 심씨의 이수형(螭首形) 대리석 묘표의 수려한 조각과 교성군부인 정씨의 하엽형(荷葉形) 화강암 묘표도 뛰어난 예술성을 보여준다.
영문
Tomb of Yi Jeon
This is the tomb of Yi Jeon (1490-1538, i.e. Prince Yeongsan), the 13th son of King Seongjong (r. 1469-1495)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His older half-brothers include Prince Yeonsan (i.e. King Yeonsangun, b. 1476, r. 1495-1506) and Prince Jinsan (i.e. King Jungjong, b. 1488, r. 1506-1544).
In his youth, Prince Yeongsan was loved dearly by his father for his intelligence and wisdom. According to a story, one day Prince Yeonsan challenged Prince Jinsan to a horse race and said that the loser would be punished according to the military law. Prince Yeongsan, knowing that his horse was very fast but could only be controlled by him, offered to race instead of Prince Jinsan. He beat Prince Yeonsan to the palace gate and was able to spare Prince Jinsan from punishment. However, later, after Prince Yeonsan was replaced by Prince Jinsan as king, Prince Yeongsan was falsely accused of being involved in several rebellions. In 1523, he was exiled to Hwanghae-do Province. After being reinstated in 1527, he spend the rest of his life secluded in nature in today’s Jingwan-dong, Eunpyeong-gu.
Prince Yeongsan’s tomb consists of two earthen burial mounds and ten stone sculptures. The burial mound to the left inters Prince Yeongsan and his first wife, Lady Sim, while the one to the right inters his second wife, Lady Jeong. There is also a burial mound for his third wife Lady Hwang at the base of the hill to the right. The stone sculptures are highly valued as they show the typical form of the 16th century. In particular, the marble tombstone of Lady Sim and the granite tombstone of Lady Jeong display outstanding artistry through their fine craftsmanship.
On the hill in front of Prince Yeongsan’s tomb are the tombs of his son Yi Sang, grandson Yi Gyeong-ui, and great-grandson Yi Jong. Spanning four generations, the cemetery shows the changes in burial practices during the 16th and 17th centuries.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조선 성종(재위 1469-1495)의 13남인 영산군 이전(1490-1538)의 묘이다. 이전의 형제로는 연산군(재위 1494-1506)과 진산대군(후의 중종, 재위 1506-1544) 등이 있다.
영산군은 어린 시절부터 영특하고 현명하여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연산군이 진산대군에게 승마 경주를 제안하면서, 경주에서 진 사람은 군법에 따라 처벌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영산군은 “제 말이 매우 빠르지만, 제가 아니면 통제할 수 없습니다”하고는, 진산대군을 대신하여 연산군보다 일찍 궐문에 도착하였고, 진산대군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종이 즉위한 이후 영산군은 여러 역모 사건에 연루되는 모함을 받았고, 1523년에는 황해도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1527년 사면된 뒤 지금의 은평구 진관동 지역에 은거하며 자연을 벗삼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영산군의 묘는 2개의 봉분과 10개의 석물로 이루어져 있다. 왼쪽 봉분은 영산군과 첫 부인인 청송심씨의 합장묘이고, 오른쪽은 둘째 부인인 경주정씨의 묘이다. 오른쪽 기슭에는 셋째 부인인 함흥황씨의 묘가 있다. 묘 앞의 석물은 16세기의 전형적인 형식을 보여주어 가치가 매우 높다. 특히 청송심씨 대리석 묘표와 경주정씨 화강암 묘표는 수려한 조각으로 뛰어난 예술성을 보여준다.
영산군의 묘 인근에는 아들인 이상, 손자 이경의, 증손자 이종의 묘소가 있다. 4대에 걸쳐 조성된 묘역으로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 조선시대 묘제의 변화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참고자료
- 영산군(寧山君),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people.aks.ac.kr/front/dirSer/ppl/pplView.aks?pplId=PPL_6JOa_A1490_1_00183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