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 초수재사
영덕 초수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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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영덕 초수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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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盈德 椒水齋舍 |
주소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묘곡리 659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26호 |
지정(등록)일 | 2007년 8월 9일 |
분류 |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1곽(1동) |
웹사이트 | 영덕초수재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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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기존 국문
없음.
수정 국문
초고
초수재사는 1636년 조선후기 학자인 박선(朴璿, 1596~1669, 호: 도와)이 증조부 박영기와 증조모 단양신씨, 조부 박세렴 등 3명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 드리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박선은 의병장 박의장(朴毅長, 1555-1615)의 넷째 아들이며 영남학파의 큰 스승인 장현광의 제자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관직 생활은 거의 하지 않고 고향에서 후진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부친 박의장은 임진왜란 당시 여러 차례 전투에서 승전하는 공을 세웠다. 이후 가문이 영덕의 명문가로 자리 잡았다.
건물은 ‘ㅁ’자 형태로 재사 한 동만 서 있다.
1차 수정
초수재사는 1636년 조선 후기 학자인 박선(朴璿, 1596~1669)이 증조부 박영기와 증조모 단양신씨, 조부 박세렴 등 3명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박선은 의병장 박의장(朴毅長, 1555-1615)의 넷째 아들이며 영남학파의 큰 스승인 장현광의 제자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관직 생활은 거의 하지 않고 고향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부친 박의장은 임진왜란 당시 여러 차례 전투에서 승전하는 공을 세웠다. 이후 가문이 영덕의 명문가로 자리 잡았다.
건물은 ‘ㅁ’자 형태로 재사 한 동만 서 있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1
-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는 口자형 재실로서 중문을 중심으로 좌측에 서재, 우측에는 마구와 주고가 있다. 대청을 중심으로 좌익사에는 사랑방과 측문이 위치하며, 우익사에는 안방과 정지(부엌)가 연접해 있다.
- 분야별 자문위원2
- 초수재사는 의병장 박의장(朴毅長, 1555~1615)의 아들 박선(朴璿, 1596~1669)이 증조부모와 조부의 묘소를 관리하고 묘제를 지내기 위해 1636년에 지은 재사이다.
- 재사는 맞배지붕이 층차를 두고 연결된 구조로서 본채와 좌‧우 익랑, 전면 행랑이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경상북도 북부 지역에 집중된 이와 같은 구조는 고식으로 평가된다. 여러 차례 보수를 거치면서 변형된 부분이 있으나 기본적으로 건립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관직 생활은 거의 하지 않고(않고->않았고) 고향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2차 수정
초수재사는 의병장 박의장(朴毅長, 1555~1615)의 아들 박선(朴璿, 1596~1669)이 증조부 박영기와 증조모 단양신씨, 조부 박세렴의 묘소를 관리하고 묘제를 지내기 위해 1636년에 지은 재사이다.
박선은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관직 생활은 거의 하지 않고 고향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부친 박의장은 임진왜란 당시 여러 차례 전투에서 승전하는 공을 세웠다. 이후 가문이 영덕의 명문가로 자리 잡았다.
재사는 본채와 좌‧우 익랑, 전면 행랑이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구조는 경상북도 북부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여러 차례 보수를 거치면서 변형된 부분이 있으나 기본적으로 건립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