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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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
Tombs of An Maeng-dam and Princess Jeongui
양효공정의공주묘역.jpg
대표명칭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
영문명칭 Tombs of An Maeng-dam and Princess Jeongui
한자 良孝公 安孟聃과 貞懿公主 墓域
주소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3-1
지정(등록) 종목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0호
지정(등록)일 1982년 11월 13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분묘 2基, 석물 10基, 토지 1,794㎡
웹사이트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이곳은 양효공 안맹담(1415~1462)과 세종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1477)의 무덤으로, 서측이 안맹담, 동측이 정의공주 무덤이다. 이들은 1428년에 결혼하여 4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안맹담[본관 죽산(竹山)]은 초서를 잘 써 서예가로 이름이 높았으며, 활쏘기와 말타기에도 출중했다.

정의공주는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책력과 산술을 잘 이해했다. 세종대왕은 특별히 정의공주를 아껴 저자도(옥수동 동쪽 한강에 있었던 섬)와 낙천정(광진구 자양동에 있었던 정자)을 내려주기도 했다.

안맹담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는 양효공(良孝公)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 ‘양(良)’은 온화하고 선량하다는 의미이며, ‘효(孝)’는 어질고 은혜롭게 어버이를 섬겼다는 의미이다.

불심이 깊었던 정의공주는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1469년 『지장보살본원경』(보물 제966호)이라는 불경을 간행하기도 했다.

무덤 앞에는 안맹담의 행적을 기록한 신도비(神道碑), 석등(石燈), 문관의 형상을 한 문인석(文人石), 묘 앞에 세우는 비석인 묘갈(墓碣) 등이 세워져 있다.

조선 시대에는 2품 이상의 관직을 역임하고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를 만들어 세웠다. 1466년에 세워진 안맹담의 신도비는 조선 초기의 신도비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손꼽힌다. 신도비의 윗부분에는 양효안공묘비라는 글씨가 전서체로 새겨져 있으며, 몸돌에는 안맹담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신도비의 비문은 부부와 사돈이기도 한 하동부원군 정인지(1396∼1478)가 지었으며, 글씨는 부부의 넷째 아들인 안빈세(1445∼1478)가 썼다. 신도비 아랫부분의 거북돌은 경복궁에 한 쌍으로 있던 거북돌 중 하나를 왕명으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영문

Tombs of An Maeng-dam and Princess Jeongui

This site includes the tombs of An Maeng-dam (1415-1462) and Princess Jeongui (?-1477) on the left and right, respectively.

An Maeng-dam was from a prestigious family in the late Goryeo (918-1392) and early Joseon (1392-1910) periods. In 1428, he married Princess Jeongui, the second daughter of King Sejong (r. 1418-1450), and had four sons and two daughters. He was a renowned calligrapher and was also good at archery and horse riding. After he died, the royal court bestowed him the posthumous title of “Yanghyo,” meaning “good and filial.”

Princess Jeongui was intelligent and wise and had a good understanding of calendar science and arithmetic. King Sejong adored his smart daughter so much that he granted her an island called Jeojado in the Hangang River and a pavilion called Nakcheonjeong in today’s Jayang-dong, Seoul. She also had a thorough knowledge of Buddhism and, in 1469, published the Ksitigarbha Pranidhana Sutra (Great Vows of Ksitigarbha Bodhisattva, Treasure No. 966) to pray for her deceased husband.

Standing at the entrance to this site is a stele recording the life and achievements of An Maeng-dam. This stele was erected in 1466. Its epitaph was composed by Jeong In-ji (1396-1478), a prominent Confucian scholar of the early Joseon period, and calligraphed by An Bin-se (1445-1478), the fourth son of the couple. The stele body is standing on a large tortoise-shaped pedestal which was brought from Gyeongbokgung Palace by a royal order.

영문 해설 내용

왼쪽은 안맹담(1415-1462)의 묘이고 오른쪽은 정의공주(?-1477)의 묘이다.

안맹담은 고려말 조선초의 명문가 출신으로, 1428년 조선 세종(재위 1418-1450)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와 결혼하여 4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서예에 능하고 활쏘기와 말타기에도 출중했다. 안맹담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는 양효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의공주는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책력과 산술을 잘 이해했다. 세종은 정의공주를 특별히 아껴 한강에 있던 저자도라는 섬과 자양동에 있던 낙천정이라는 정자를 내려주기도 했다. 정의공주는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1469년에는 죽은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장신앙의 기본 경전인 『지장보살본원경』(보물 제966호))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묘역 입구에는 안맹담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신도비가 있다. 이 신도비는 1466년에 세워졌으며,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정인지(1396-1478)가 비문을 짓고 부부의 넷째 아들인 안빈세(1445-1478)가 글씨를 썼다. 비신은 커다란 거북모양 받침돌 위에 세워져 있는데, 이 거북돌은 경복궁에 있던 것을 왕명으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